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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2-11
Religion 2-11
동서교회 대분열 11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11
동서교회 상호 파문
Mutual Excommunication
1037년,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는 불가리아 왕국 병합 이후 총대주교구에서 대주교구로 격하시킨 불가리아 교회의 위상을 다시 돌려놓기로 결의하였다. 그래서 대주교좌가 있던 오흐리트(Охрид)의 대주교에게 '전 불가리아의 대주교'라는 호칭을 겸하도록 하였고 라브 1세(Лав А: 1037-1056)를 그 자리에 앉혔다. 라브 1세는 원래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활동하던 그리스인 수도사였기 때문에 불가리아 교회는 급속도로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와 밀접관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 비록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이 매우 약화되긴 했지만, 동유럽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교황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여전히 많은 지역에서 동방 교회의 전례와 서방 교회의 전례가 동시에 행해지고 있었다.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던 라브 1세 입장에서는 불가리아에서 행해지는 서방 교회의 전례는 교회의 전통과 한참 멀어진 전례였고, 그는 때때로 이 사실에 개탄해마지 않았다. 안타까움이 너무 컸던 그는 1053년 이탈리아 남부 트라니(Trani)의 수도대주교였던 요한네스(Iohannes)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 사실 이 편지의 진짜 수신인은 편지에 쓰여있는대로 로마 교황과 서방 교회 그 자체였으며, 요한네스는 서신을 당시 추기경이었던 움베르(Humbert)에게 전하였다. 움베르 추기경은 이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최종적으로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9세(Leo IX: 1049-1054)에게 전달하였다.
편지에서 다룬 가장 큰 쟁점 사항 중 하나는 바로 성만찬에 사용하는 빵의 종류에 관한 것이었다. 서방 교회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얇게 만들어1 신자들에게 나눠주었지만 동방 교회는 누룩을 넣어 만든 빵을 신자들에게 베풀었다. 이는 예수가 체포되기 전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이 언제였느냐에 대한 신학적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유월절 이후에 이어지는 무교절에는 모세의 이집트 탈출 역사를 기념하여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먹어야 했는데, 서방 교회에서는 마지막 만찬이 이 시기에 있었다고 생각하여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성만찬에 사용하였다. 반면 동방 교회에서는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모이긴 하였어도 결국 무교절 시작 이전에 마지막 만찬이 행해졌으므로 당연히 누룩이 들어간 빵을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4 한편 비슷한 시기에 보수적인 스투디우 수도원의 수도사인 니키타스(Νικήτας)가 서방 교회를 비방하는 글을 쓴다. 주된 내용은 서방 교회에서 행해지는 전례에 관한 것이었는데 여기서 니키타스는 서방 교회 교인들을 '개'에 비유하며 성만찬에 무교병을 쓰는 것과 토요일에 금식하는 것, 사제의 독신제도 등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일련의 문서들은 동방 교회 내에서 서방 교회의 의식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데 일조했고, 그것은 교황의 권력에 대한 위기 의식과 결합되어 적개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탈리아 남부를 차지한 노르만인들의 교회들이 서방 교회 전례를 따르도록 결의한 것이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노르만인들의 손에 들어갔다고는 하나 이탈리아 남부는 여전히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의 관할 하에 있었다. 동방 교회 사람들은 노르만인들이 이러한 결의를 하게 된 배후에는 로마 교황의 지대한 영향력이 있었다고 믿었다. 겉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반(反)서방 교회 분위기는 결국 세계총대주교 에프스타시오스(Ευστάθιος: 1019-1025)의 배려에 따라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세워졌던 라틴 전례 교회들을 일거에 폐쇄시키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교회 내의 감실5에 보관되어 있던 성체들이 콘스탄티노스(Κωνσταντίνος)라는 이름의 관리에게 의해 짓밟히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동방 교회 사람들은 감실에 보관되어 있던 빵들이 무교병이었으므로 온전한 의미의 성체가 아닌 이단적 음식에 불과했기 때문에 모독당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동서교회 양 진영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기회로 여겼던 사람이 바로 당시 세계총대주교 미하일 1세(Μιχαήλ Α΄: 1043-1059)였다. 그는 서방 교회의 교황 세력을 누르고 더 높은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미하일 1세는 처음부터 동방 교회 성직자들의 반서방 교회 언동을 뒤에서 은근히 지지하였고, 적극적으로 동방 주교들 사이에 문서를 회람시켜 반서방 교회 분위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반서방 교회 정책이 동방 교회 내에서 철저하게 시행되길 원했으나 그렇다고 함부로 분열을 조장하는 일을 대놓고 할 수는 없었기에 물밑에서 도발 작업을 수행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16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노르만인들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교황과 비잔티움 제국이 모두 위기에 놓인 때였다. 종교적으로는 두 수장(교황과 세계총대주교)이 반목하고 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두 수장(교황과 비잔티움 황제)의 이해관계가 적절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하일 1세도 무작정 교황과의 연합을 반대할 수는 없었다. 교황과 서방 교회를 이용해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에서의 우위를 되찾고자 한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Κωνσταντίνος Θ΄)의 압력이 대단했다. 결국 세계총대주교는 서신을 보내어 적당한 선에서 종교적 갈등을 마무리 짓는 편이 좋겠다고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미하일 1세가 보낸 편지가 매우 고압적인 편지, 아니 포티오스 분열 때에도 받아보지 못한 매우 오만불손한 편지라고 여겼다. 편지에는 아주 공개적으로 자신을 세계총대주교로 칭하고 있었고, 당시 주교들이 로마 교황을 언급할 때 쓰는 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형제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레오 9세는 미하일 1세가 보낸 편지를 읽고 화가 끝까지 치밀었지만 당시 그는 노르만인들에 의해 감금당해 있을 때였던지라 자의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7 대신 세 명의 특사 편에 황제와 미하일 1세에게 보내는 편지를 딸려 보냈다. 특사는 아까 등장했던 움베르, 또다른 추기경인 프리드리히(Friedrich), 그리고 아말피(Amalfi)의 대주교인 피에르토(Pierto)였다. 이들이 콘스탄티누폴리스에 간 것이 1054년 4월의 일이었다.
특사 파견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번째는 비잔티움 황제를 알현하여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를 차지한 노르만인들에게 대적하는 것에 협조를 구하는 것, 두번째는 종교적으로 대립 중인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를 만나 갈등을 해소시킬 것이었다. 특사들은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교황과의 협력을 강력히 희망하는 황제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미하일 1세 입장에서 이들은 성가신 불청객이었고, 그들을 향한 황제의 환영이 매우 못마땅할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미하일 1세는 특사들의 방문에 응대해야했고,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의 가장 큰 어른으로서 몇 가지 형식적인 환영 의례들을 취해야했다.
그러나 특사들이 가지고 온 레오 9세의 편지는 기어이 미하일 1세의 성질을 건드리고야 말았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편지의 인장은 변조되었고, 또 편지의 초안은 미하일 1세에게 읽히기도 전에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가 되었다고 한다. 그 도시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권위가 있는 세계총대주교로서는 모욕을 느낄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편지의 내용이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 레오 9세는 이 편지에서 소위 '콘스탄티노스의 기증(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9을 근거로 하여 거룩한 사도좌인 로마의 주교인 교황은 온 기독교 세계에 대한 수위권을 가지고 있으니 총대주교들이 자신의 뜻을 존중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와는 달리 세계총대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화해와 양보에 대한 내용은 커녕, 서방 교회의 우위를 증명하는 내용들로 가득했으며 가뜩이나 열이 올라있는 미하일 1세를 분기탱천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한술 더떠 당시 특사들의 우두머리였던 추기경 움베르의 태도는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성직자들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했다. 불행하게도 움베르는 미하일 1세만큼이나 거칠고 다혈질인 성격의 호전적인 성직자였다.10 움베르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미하일 1세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맞섰으며, 교황의 편지를 건네고 궁정을 휑하니 나와버렸다. 미하일 1세는 모욕감을 여전히 감출 수가 없었다. 특사들의 행동은 동방 교회의 성직자들과 시민들에게도 반발을 샀고, 궁정 안팎에서 벌어지는 특사들과 동방 성직자들간의 답없는 논쟁은 종교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여망마저 끊어버렸다. 분노한 미하일 1세는 결국 특사들의 권위를 무시하고 더 이상 교류하지 않기로 했다. 이 조치에 의해 특사들은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있음에도 성직자들에게 무시당하고 냉대받기 일쑤였다. 이젠 움베르가 분노하기 시작했다. 움베르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준비한다.
1054년 7월 16일 토요일 오후, 전례가 진행되던 성 소피아 성당에 교황의 특사들이 뜬금없이 등장했다. 이들은 성당 제단 위에 뭔가를 올려놓고 알수 없는 라틴어를 외치더니 문밖에서 신발을 벗고 교회를 향해 먼지를 터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이틀 뒤에 그들은 로마를 향해 떠나버렸다. 전례가 끝나고 제단 위의 그 뭔가를 발견한 동방 교회 성직자들은 경악과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교황의 파문장이었다. 그리고 특사들이 외친 말은 바로 '하느님께서 보시고 판단하실 것이다(Videat Deus et Judicet)'였다. 이들이 동방 교회의 심장과도 같은 성 소피아 성당에서 세계총대주교를 저주한 것이다!
특사들은 교황의 수위권을 옹호하는 입장을 피력할 수 없게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결국 상대방을 파문하는 파멸적인 결론을 내기로 합의했던 것이다. 파문의 대상은 미하일 1세와 라브 1세, 성체를 짓밟은 콘스탄티노스, 그리고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많은 동방 교회들이 이들의 영도하에 있었고, 이들과 가까이 통교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자면 사실상 동방 교회 전체를 파문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파문장에는 총 11가지의 사유가 등장한다. 여기서 잠깐 그들이 남긴 파문조서를 살펴보자.
(전략) 그러나 총대주교라는 직함을 경솔히 사용하는 미하일과 그의 우둔함을 따르는 자들만큼이나 매일 셀 수 없는 이단적인 잡초들의 씨가 그 가운데 뿌려지고 있다.
그들은 성직 매매자들(Simoniacs)처럼 하느님의 은혜를 매매하고,
그들은 발렌스 추종자들(Valesians)처럼 사람들을 거세시키고,
그들은 아레이오스주의자(Arians)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사람들, 특히 라틴인들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며,
그들은 도나투스주의자(Donatist)처럼 동방 교회를 빼고는 다른 교회가 없으며 또한 거기서 베푼 세례가 무효임을 주장하며,
그들은 니골라당원(Nicolaitist)처럼 성직자들의 혼인과 성관계를 인정하고 옹호하며,
그들은 세베리안주의자(Severian)처럼 모세의 율법이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하며,
그들은 성령대항자(Pneumatomachoi)처럼 성령이 성자로부터 발출하심을 부정하며,
그들은 마니교인(Manichaean)처럼 물질에도 영혼이 있음을 주장하였고,
그들은 나사렛인(Nazarene)처럼 유대인들의 정결 정신을 수호하여 태어난지 8일이 되기 전에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풀기를 거절하고, 임신 혹은 월경 중인 여성과 교제하기를 거부하며, 이교도에게는 세례를 베풀지 않으며,
그리고 그들은 머리와 수염을 기르기 때문에 로마 교회의 칙령에 따라 머리와 수염을 깎은 자들과 교제하지 않는다.
우리의 주인되신 교황 레오께서 편지를 통해 이러한 잘못들을 경고하셨음에도 미하일과 그의 추종자들은 방자하게도 회개하기를 거절하였다.
게다가 교황의 대사들인 우리가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큰 죄악의 근본을 제거하고자 하였을 때 미하일은 우리와 함께 있지도, 대화를 하지도 않았으며 교회로 하여금 미사를 봉헌하지도 못하게 만들었으니 일찍이 라틴인들의 교회를 폐쇄하였으며, 라틴인들을 무교병주의자(無酵餠主義者, azymite)라고 비방하면서 말로나 행동으로나 박해하였다. 실로 이와 같이 라틴인들을 박해한 것뿐 아니라 자기들끼리 모여 사도좌를 저주하며 대적하였으며 지금도 자기를 세계총대주교(ecumenical patriarch)라고 참칭하고 있다.
(중략)
권력의 남용으로 등극한 신출내기 총대주교 미하일은 단지 사람이 무서워서 수도원 생활을 했던 것 뿐이며 이제 그가 저지른 많은 죄악의 추악함으로 인해 고소당하는 바이다. 그와 함께 아크리다(Achrida, 불가리아의 대주교좌가 있던 오흐리트의 라틴어 표기)의 주교인 라브 1세, 그리고 라틴인들의 희생제물을 속된 발로 짓밟은 콘스탄티노스, 그리고 앞서 말한 오류들과 건방진 행동들을 따르는 자들 역시 고소당하는 바이다. 그들은 곧 영원한 저주에 처하리니 곧 성직 매매자들과 발렌스 추종자들과 아레이오스주의자들과 도나투스주의자들과 니골라당원들과 세베리안주의자들과 성령대항자들과 마니교인들과 나사렛인들과 모든 이단들이며,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악마와 함께 하는 것일지어다. 아멘. 아멘. 아멘.
이 파문장으로 인해 콘스탄티누폴리스는 삽시간에 그야말로 폭동과도 같은 분위기로 돌변하였다. 서방 교회와 화친하고자 하는 세력으로 낙인찍힌 남부 이탈리아 총독 아르기로스(Αργυρός)의 가족들은 성난 신자들에 의해 끌려나왔고, 특사들이 남긴 파문장은 찢겨져 불태워졌다. 나흘 뒤 미하일 1세는 주교 회의를 소집했고, 여기서 교황 특사들을 저주하고 맞파문에 처한다. 이 때의 사건을 동서교회 대분열(Great Schism)이라고 하며 1054년의 일이었다.
앞서 살펴봤듯 서로 파문에 처할 정도로 저주를 퍼부은 분열은 두 번 있었는데, 첫번째는 아카키오스 분열11, 두번째는 포티오스 분열12였다. 분열의 당사자는 두 명인데 세계총대주교 이름으로만 분열이 표현된다는 게 다소 편향적이긴 하지만, 통상적으로 그렇게 불린다. 그런데 이번에 일어난 분열은 미하일 분열이라고 불리지 않고 대분열이라는 보다 상징적인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이 때 일어난 분열이 재빨리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카키오스 분열은 유스티니아노스 1세(Ιουστινιανός Α')에 의해, 포티오스 분열은 어정쩡하긴 하지만 이그나티오스(Ιγνάτιος: 847-858, 867-877)가 주최했던 세계 공의회에 의해 명목상 해소되었다. 그러나 1054년의 상호 파문이 철회된 것은 무려 911년이 지난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 1963-1978)와 세계총대주교 아티나고라스 1세(Αθηναγόρας Α': 1948-1972)에 의해서였다.
교황 특사들의 파문장이 과연 유효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특사들이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조서를 작성할 때 정작 그들을 보낸 레오 9세는 이미 선종했고 교황좌는 일시적으로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교황의 권위를 위임받은 특사들이지만 그들이 교황을 대리하여 어떤 결정이라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이 파문장은 유효하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레오 9세가 베네벤토(Benevento)에 유폐되어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졌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분명 비잔티움 제국에서 특사들이 어떤 경우에는 어떻게 행동해야할 것인지 일러두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 않을까. 아무리 움베르가 다혈질의 인물이었다고 해도 교황의 뜻을 거스르거나 교황인 척 하려는 그런 위험한 인물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면. 어쨌든 파문이 내려진 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고, 1054년 이후로 기독교 세계는 명백하게 큰 두 부분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동서교회 대분열은 교회사의 아픔이었지만 미하일 1세에게는 기회였다. 이제 영구히 서방 교회 세력을 동방 교회 내에서 합법적으로 축출시킬 수 있지 않은가. 이제 남은 것은 비잔티움 황제였다.
종교만큼이나 비잔티움 제국의 정치도 11세기 중반에 아주 복잡하게 전개된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9세가 죽고 나서 짧은 기간동안 테오도라(Θεοδώρα)가 제위를 맡고난 뒤 미하일 6세(Μιχαήλ ΣΤ΄)가 황제가 된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들대로 든 미하일 6세의 치세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특히 그가 군인 귀족들을 박대하는 것 이상으로 멸시하자 궁정에 매우 불온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결국 파플라고니아 지방으로부터 반란이 일어났고 이들은 콤니노스(Κομνηνός) 가문의 이사키오스(Ισαάκιος)를 황제로 추대한다.
반란을 일으킨 군대가 삽시간에 콘스탄티누폴리스로 향하자 놀란 미하일 6세는 이사키오스를 부제(副帝, caesar)에 임명하는 선에서 이 사태를 무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세계총대주교 미하일 1세는 미하일 6세에게 퇴위하여 수도원에 은거하라고 조언하였고, 급기야 반란군을 위해 콘스탄티누폴리스 성문을 열었다. 결국 세계총대주교의 이 적극적인 개입으로 인해 미하일 6세는 완전히 정권을 잃게 되었고 새로이 이사키오스 1세(Ισαάκιος Α΄)가 황제로 등극하였다. 비잔티움 역사상 세계총대주교를 만든 황제는 있었지만 황제를 만든 세계총대주교는 이제까지 없었다. 그런데 바로 미하일 1세가 그 역사적인 일을 해낸 것이었다. 시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미하일 1세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지게 된다.
이사키오스 1세는 즉위 이후 커져 버린 세계총대주교의 종교 권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미하일 1세로서는 분기탱천할 일이었다. 자기 덕분에 황제가 되었는데 감히 자신을 견제하려들다니 하는 억한 심정이 그를 더욱 완고하게 만들었다. 이 와중에 이사키오스 1세는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여 군사비에 충당할 것이라는 방침을 하달하였고, 미하일 1세는 이에 더 이상 참지 않고 강경한 태도로 반발하였다. 황제와 세계총대주교 사이의 균열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지금까지 세속 권력의 정점인 황제에 대항하는 주교는 늘 로마의 주교였던 교황이었으나 이제는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주교가 황제의 명을 거역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전제군주의 초월적 권력이 확고하게 인식되었던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 황제의 권력은 주교의 힘보다 훨씬 더 우월하고 강했다. 미하일 1세는 이사키오스 1세에 의해 폐위당했고 그 자리는 콘스탄티노스 3세(Κωνσταντίνος Γ΄: 1059-1063)에게 넘어갔다. 미하일 1세는 반역을 도모하고 황제의 권위를 업신여겼다는 죄목으로 처벌을 받았는데, 사료에 따르면 그는 황제를 상징하는 보라색 신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14 미하일 1세는 황제를 거역한 불충한 신하라는 오명을 쓰고 유배길에 오르게 되었고, 유배길에 배가 좌초되면서 목숨을 잃게 되었다.15
살펴본 바와 같이 1054년의 대분열은 다른 분열이 그러했듯 당사자들에 의해 해결되지 못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1054년의 대분열 이후에 동서교회의 교류가 단숨에 모두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고성직자가 아닌 평신도들은 대분열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고, 특히 콘스탄티누폴리스의 귀족층이나 동서교회 세력확장의 각축전이 된 일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분열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지도 않았다. 서방 사람을 만날 일이 없는 동방의 신자들, 동방 사람을 만날 일이 없는 서방의 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교구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믿으며 살아갈 뿐이었다.
하지만 11세기부터 성장하기 시작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활발한 지중해 무역으로 인해 서방 사람들의 문화가 비잔티움 제국 일반 민중들의 삶을 파고들었고, 이들의 제국 내 정치적 세력 확대는 서방에 대한 경계심 이상의 적개심을 이끌어 내었다. 이는 1054년에 있었던 '위로부터의 분열'을 아래에까지 침투시켰고 결국 1세기가 지나면서 일련의 사건들이 터지게 되면서 동서교회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고 말았다. 성직자들이 미처 손쓰기 전에 대분열을 대분열답게 만드는 일들이 발생하고야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