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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십자군 원정
The 4th Crusade
10세기 이후 콘스탄티누폴리스는 그 어느 유럽 도시들보다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교역과 상업이 번성한 당대 세계 최고 도시들 중 하나였다. 당시 그 위세와 견줄 수 있는 도시는 후(後)우마이야 제국의 수도였던 코르도바(قرطبة), 그리고 지구 반대편 중국 송(宋)나라의 수도였던 카이펑 정도였을 것이다. 이런 국제적인 대도시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상인들과 노동자들이 넘쳐났으며, 이러한 환경 속에서 문화의 교차 및 융화가 이뤄질 수 있었다.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나쁜 경우에는 문화의 충돌이 일어날 소지 역시 다분했다. 특히 현대와 같은 포용과 이해의 자세가 강조되지 않았던 중세 시대에 외국인의 발호에 대한 경계는 동서를 막론하고 어디에나 있었다. 콘스탄티누폴리스도 마찬가지였다.
1180년 마누일 1세가 죽고 뒤를 이어 어린 알렉시오스 2세(Αλέξιος Β')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섭정은 모후인 마리아(Μαρία)였는데, 그는 안티오키아 공작이었던 프랑크 사람 레몽(Raymond)의 딸로 십자군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마누일 1세가 정략적으로 맞아들인 두번째 부인이었다. 그리스계가 아니었던 그녀를 사람들은 외국인이라고 여겼다. 안그래도 서방 사람들로 인해 분노가 치밀었던 콘스탄티누폴리스 시민들은 황제를 움직이는 권력을 쥔 섭정이 서방 여자라는 사실에 염증을 느꼈고, 게다가 그녀가 고위 관료로 친서방 성향을 가진 인물들을 임명하는 것을 두고 크게 비난하였다.
황제가 어리고 섭정이 외국 출신이다보니 권력 기반은 아직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의 신망마저 잃었으니 반란이 일어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결국 1182년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황제의 친척뻘인 안드로니코스(Ανδρόνικος)가 군사를 이끌고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입성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그는 황후 마리아를 유폐시킨 뒤 처형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 황제 알렉시오스 2세를 교살(絞殺)시킨 뒤 자신은 안드로니코스 1세(Ανδρόνικος Α' )의 이름으로 단독황제가 된다.
한편 안드로니코스가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입성한 사건은 곧 서방 사람들에게 농단당한 궁정이 구원되는 영웅적인 일로 받아들여졌고, 이를 환영하는 시민들의 열기는 금새 폭력성을 띠기 시작했다. 결국 그 해에 콘스탄티누폴리스에 거주하던 수많은 라틴인들은 집단적인 광기에 사로잡힌 콘스탄티누폴리스 시민들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추방당하였으며, 그들의 재산은 파괴되고 몰수되었다. 5~6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일거에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사라졌으며 살아남은 많은 라틴인들은 노예로 팔려나가기까지 했다. 또한 이는 종교적 대립으로까지 비화되었다. 성난 시민들은 라틴인들의 교회를 약탈하고 방화하는 등 폭력적인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급기야 콘스탄티누폴리스에 파견되어 있던 로마 가톨릭 성직자를 붙잡아 공개처형하고 그의 목을 잘라 개 꼬리에 묶어 돌리는 엽기적인 행각도 벌이고 말았다.
라틴인 학살(Σφαγή των Λατίνων)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 동서교회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이제 일반 민중들마저도 서로의 문화, 관습, 그리고 종교를 혐오하고 배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서방 사람들의 충격은 대단히 컸는데, 저 영화로운 도시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이리도 무시무시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듯 하다. 콘스탄티누폴리스는 언제나 아름답고 웅장한 도시로 칭송받았지만, 그 성스러운 도시를 다스리는 제국인 비잔티움이라는 단어에 점차 적개심이 녹아들어가기 시작했다.4 이는 1054년의 대분열의 씨앗이 만들어 낸 첫 쓴 열매였다.
라틴인들의 반격은 3년 뒤인 1185년, 비잔티움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테살로니키(Θεσσαλονίκη)에서 일어났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폭압 정치하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힘은 급속도로 약화되어 주변 민족들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이에 노르만인들이 세운 시칠리아 왕국의 지도자 굴리엘모 2세(Guglielmo II)는 6월에 디라히오(Δυρράχιο)5를 점령하더니 곧장 테살로니키로 물밀듯이 쳐들어갔다. 무능한 지도자와 허약한 수비력으로 인해 테살로니키는 금방 무너졌고, 수천명의 시민들이 학살당하고 노예로 팔려나갔다. 이는 그리스인 배신자 트리폴리의 레온(Λέων ὸ Τριπολίτης)이 이끄는 아랍 함대에 의한 904년의 테살로니키 약탈 이후로 가장 큰 약탈이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은 서방 사회를 완전히 적대시하게 되었고, 제국의 최대 적수 중 하나인 노르만인들에 대한 분노를 더욱 부채질하는 계기가 되었다.6
한편 테살로니키 함락 사건은 비잔티움 정가에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안그래도 인기가 나락으로 떨어진 안드로니코스 1세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거셌으며, 그가 해군을 소집하여 제국의 방비를 위해 콘스탄티누폴리스를 비운 사이 앙겔로스(Άγγελος) 가문의 귀족인 이사키오스(Ισαάκιος)가 반란을 일으켜 제위를 찬탈한다. 몰래 수도를 빠져나가려던 안드로니코스 1세는 곧 체포되었고, 성난 시민들은 거리에서 그를 매우 잔인하게 죽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오른손은 잘려나갔고, 이와 머리카락은 모두 뽑혔으며, 눈은 멀어 장님이 되었고, 끓는 물이 얼굴에 부어져 화상을 입었다.7 그리고 최종적으로 원형경기장에서 두 명의 라틴 군인들이 쥔 칼에 의해 찢겨져 죽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이 앙겔로스 가문에 의해 더욱 처참한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1185년에 비잔티움 제국에게 치명적인 일이 또 하나 발생했는데, 바로 160여년전 '불가르족 학살자'로 불린 바실리오스 2세(Βασίλειος Β΄)에 의해 복속되었던 불가리아가 이반 아센 1세(Иван Асен I)의 영도 하에 독립한 것이다. 순식간에 발칸 반도에서의 우위를 상실한 비잔티움 제국은 불가리아를 재정복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이 와중에 황제 이사키오스 1세(Ισαάκιος Α')는 형 알렉시오스 3세(Αλέξιος Γ')가 일으킨 반란에 의해 제위를 빼앗기고 눈이 뽑혀 장님이 되고 말았다. 이 때 이사키오스 1세의 아들 알렉시오스9는 1201년에 극적으로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는데, 아버지의 복권과 삼촌에 대한 응징을 도모하기 위해 서방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자 신성 로마 제국으로 향한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매형인 필립(Philipp)을 만났고, 그리고 몬페라토(Monferrato)의 후작인 보니파치오(Bonifacio)를 만났는데 필립과 보니파치오는 서로 사촌지간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매우 치명적인 결의를 내렸으니, 바로 새로 조직되는 제4차 십자군을 비잔티움 제국 정치에 개입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 1198-1216)는 십자군을 이용하여 기독교 국가의 도시는 공격하지 말라고 권고하였으나 이 권고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10
이 십자군을 실질적으로 이끈 리더는 다름아닌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Doge)11였던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였다. 십자군은 당시 베네치아 해군을 이용하여 지중해를 건너갈 계획이었는데, 함대를 이용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서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러자 엔리코 단돌로는 십자군을 충동질하여 얼마전에 헝가리 왕국에게 점령당한 자다르(Zadar)를 점령하여 부채를 해결하라고 종용하였다. 결국 십자군은 엔리코 단돌로의 책략대로 어이없이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의 자다르를 공격하였다. 트리에스테(Trieste), 몰리아(Moglia)에 이어 자다르까지 점령한 제4차 십자군의 행보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크게 분노하였고 결국 십자군 전체를 파문에 처하였다. 그러나 영리한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이러한 교황의 움직임에 크게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교황을 설득시키고 있았다. 즉, 만일 십자군이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제위를 찬탈한 알렉시오스 3세를 쫓아내고 이전 황제인 이사키오스 1세를 복권시킴과 동시에 그의 아들 알렉시오스를 공동황제 자리에 앉힌다면 동방 교회가 로마 가톨릭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고 이렇게 되면 동서교회의 일치라는 거룩한 소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꼬드긴 것이다. 물론 이것은 완전한 순 100% 거짓말은 아니었던 것이, 실제로 알렉시오스가 서방 세계 측에 제안했던 바이기도 했고 십자군을 통해 은밀히 뒤에서 약속했던 것이기도 했다. 결국 교황은 화를 누그러뜨리고 동서교회의 일치라는 대의 하에 군사행동을 승인하였다.
1203년, 베네치아의 함대가 라틴 군사들을 싣고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당도했다. 무능한 알렉시오스 3세는 진귀한 보물들을 챙겨 트라키(Θράκη)로 도망하였고, 공방전 끝에 결국 십자군은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손쉽게 입성할 수 있었다. 장님 이사키오스 2세는 복위되었고, 그의 아들은 드디어 소원을 성취하였으며 알렉시오스 4세(Αλέξιος Δ' )로서 아버지와 함께 공동황제가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알렉시오스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에 있을 때부터 서방으로부터 원조를 많이 얻어내기 위해 지키지도 못할 많은 것들을 서방 사람들에게 약속했다. 우선 경제적으로는 많은 재물을 약속했고, 종교적으로는 로마 가톨릭과의 일치를 약속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도 지킨 것이 없었다. 알렉시오스 3세 치세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국고는 바닥을 드러냈으며 게다가 그는 궁정의 재화를 모두 가지고 도망을 간 생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알렉시오스 4세는 채무를 갚기 위해 높은 세금을 시민들에게 물렸는데 시민들의 격앙된 반응을 사는 것밖에는 소득이 없었다. 이런 민감함 상황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한다는 소식은 타오르는 불에 끓는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당시 세계총대주교였던 요안니스 10세(Ἰωάννης Ι': 1198-1206)는 교황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필리오케 삽입을 분명하게 거절한 바 있었다. 모든 시민들과 성직자들은 황제가 로마 가톨릭과 굴욕적인 협정을 체결했다는 사실에 크게 반발했고, 결국 1204년 1월에 황제 타도의 기치를 내건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결국 알렉시오스 4세는 폐위되었고, 부자(父子) 황제는 살해되었다. 제4차 십자군의 계약 당사자가 죽은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제위는 쿠데타를 주도했던 알렉시오스 5세(Αλέξιος Ε')에게 돌아갔다. 그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주둔한 라틴 군사들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철군할 것을 주장하였고, 전임 황제가 맺은 채무 역시 위법적이라고 여겨 협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알렉시오스 5세의 뒤통수 때리기 전략은 제4차 십자군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십자군은 콘스탄티누폴리스를 다시 공격하기에 이른다. 놀랍게도 이 공격의 목적은 정치 개입이 아니라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점령 그 자체였다. 안타깝게도 이미 방어력이 저 아래로 떨어진 콘스탄티누폴리스는 라틴인들의 공격을 견뎌낼 수 없었다. 십자군의 위력은 대단했고, 약화될 대로 약화된 비잔티움 제국의 군대는 천혜의 요새였던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성을 지켜낼 수 없었다. 결국 십자군은 1204년에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점령하고 말았다.
아름답고 위대한 도시를 점령한 십자군은 더 이상 성지를 수호하고 탈환하기 위해 일어난 성스러운 군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약탈자고 방만한 침략자였다. 수많은 곳에서 방화와 약탈이 발생했다. 군인들은 시내 곳곳을 돌며 온갖 재물을 빼앗아갔고, 특히 많은 성당과 수도원에서 돈이 될만한 진귀한 것들을 취했다. 어느 곳에서나 신성모독이 이루어졌고 수많은 콘스탄티누폴리스 시민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폭행당하고 살해당했다. 특히 여성들은 심지어 수녀들까지도 십자군에 의해 강간당했다고 전한다.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도서관은 파괴되었고 수많은 장서와 조각품들이 탐욕스런 십자군들에 의해 불타거나 서방 세계로 유출되었다. 약탈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현재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 정문에 있는 네 마리의 청동상인데, 이것은 원래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원형 경기장에 있던 것이었다. 성 소피아 성당도 예외는 아니라서 제단의 수많은 성물들과 금박 모자이크 등은 모두 약탈당했다. 야만적인 십자군들은 거대한 헤라클레스 청동상을 녹여 청동 덩어리로 만들어 노획할 정도로 재물에만 욕심을 냈지 그들이 파괴하는 문화적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괴멸적인 파괴는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던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리스 문화와 철학, 그리고 고대로부터 전해진 수많은 건축물과 조각이 3일간의 약탈 속에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비잔티움 제국은 붕괴되었고,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자행된 이 약탈 사건은 비잔티움 제국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되어 로마 가톨릭과 서방 사람들을 극도로 혐오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다. 1054년의 대분열은 정확히 150년이 지난 1204년에 제대로 뿌리 깊게 완성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이 모든 것을 지휘하였고, 결국 베네치아 공화국이 이 약탈의 승리자가 되게 하는 데 엄청나게 큰 기여를 하였다. 콘스탄티누폴리스 약탈 사건 덕분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경쟁 관계에 있던 피사와 제노바를 따돌리고 지중해를 완전히 제패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점령하여 라틴 제국(Imperium Romaniae)을 세웠고 초대 황제로 플랑드르(Flandre)와 에노(Hainaut)의 백작인 보두앵(Baudouin)을 옹립하였다. 원래 그 자리는 제4차 십자군의 수장이었던 보니파치오의 것이어야 했지만 베네치아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친베네치아 성향을 가진 보두앵을 밀고 보니파치오를 경계했던 것이다. 이에 분개한 보니파치오는 테살로니키로 넘어가 테살로니키 왕국을 세웠고 초대 왕으로 등극했다.
종교적으로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라틴 총대주교구가 신설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콘스탄티누폴리스가 약탈된 상황을 접하고 화를 낼 힘조차 없어 매우 허탈해 했으나 어쨌든 동방교회를 형식적으로나마 교황 산하로 두게 되는데 성공하였다. 최초의 라틴 총대주교로서 당시 가톨릭 교회의 차부제였던 토마소 모로시니(Tommaso Morosini)가 선출되었는데,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의 재가와 임명 없이 총대주교를 선출하는 것이 불법적이라고 주장하였으나 기정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비잔티움 제국에 세워진 라틴 교회는 서방교회의 전례를 그대로 시행했으며, 이는 비잔티움 제국 옛 영토에 잔류한 동방 교회 신봉자인 그리스계 시민들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되었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의 후예들은 각지로 흩어져서 계승 국가들을 세웠다. 먼저 콤니노스 두카스(Κομνηνός Δούκας)가문은 아르타(Άρτα)에서 에피로스 공국(Δεσποτάτο της Ηπείρου)을 세웠다. 또한 십자군의 콘스탄티누폴리스 점령 이전에 보물을 가지고 도망쳤던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인 테오도로스(Θεόδωρος)는 니케아(Νίκαια)에서 계승 제국을 세웠다. 한편 십자군의 콘스탄티누폴리스 공격과는 무관하게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인 알렉시오스가 흑해 연안에서 콤니노스 황조의 재건을 선언하며 트라페준타 제국(Βασίλειον τής Τραπεζούντας)을 세웠다. 이 세 국가 중 콘스탄티누폴리스와 가장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니케아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 재건의 선봉에 서 있었다. 니케아 제국의 초대 황제인 테오도로스 1세(Θεόδωρος Α')는 콘스탄티누폴리스 망명 세계총대주교청을 니케아에 설치하였고, 미하일 4세(Μιχαήλ Δ': 1206-1212)를 세계총대주교에 임명하였다. 미하일 4세는 니케아에서 테오도로스 1세의 대관식을 거행하였으니 이것이 1206년의 일이었다. 이 니케아 제국은 초기에는 주변국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제대로 힘을 못 쓰다가 점차 실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불가리아와의 대결에 힘이 빠진 라틴 제국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서방 세계에 대한 비잔티움 제국 시민들과 교회의 분노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이제 동서교회 모두 서로의 관습과 신학적 차이를 두고 논쟁하는 차원을 넘어섰고, 아예 상종 못할 원수가 되고 말았다. 성직자 뿐 아니라 일반 민중들도 마찬가지의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13세기 이후 비잔티움 황제들은 몰락하는 제국을 지켜내고자 서방 세계로부터 정치군사적 원조를 받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동서 교회 일치를 약속하곤 했지만, 그 약속은 서방 세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공유했던 성직자들과 국민들에 번번히 파기당했다.
라틴 제국이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차지하자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청은 쫓겨나듯 니케아 제국의 수도인 니케아로 옮겨졌다. 비록 교회의 조직과 총대주교좌 자체는 여전히 건재했지만, 상징성이 강한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상실하게 되자 동방교회 내에서의 세계총대주교좌의 입지는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제국의 강역이 축소된 상황에서 유럽으로 진출하는 길이 새로 생겨난 라틴 제국에 모두 막혀 있으니 그 지역 너머에 남겨진 동방교회들을 치리하기 매우 어려워지고 말았다.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는 이들 지역 교회들이 라틴 제국과 협력하다가 결국 로마 가톨릭 세력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심각히 우려하였다. 그리고 그 걱정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반 아센 1세(Иван Асен I)의 영도 하에 독립하여 성장한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점점 번영의 일로를 걷게 되는데 1202년, 당시 차르였던 칼로얀(Калоян)은 자신을 황제로 인정해 줄 것과 수도 터르노보(Търново)에 총대주교좌를 설립해 줄 것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요청하게 된다. 인노첸시오 3세는 불가리아 세속 정권의 불손한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았으나 추기경을 보내 바실리(Василий)를 불가리아의 대주교로 삼았으며 칼로얀을 불가리아와 블라크5의 왕으로 삼았다. 이렇게 시작된 불가리아 교회와 로마 가톨릭과의 상통은 수십년간 지속되었다. 동방교회의 든든한 세력이었던 불가리아가 로마 교황과 손을 잡은 사건은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의 얼굴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217년, 인노첸시오 3세의 뒤를 이은 교황 호노리오 3세(Honorius III: 1216-1227)는 불가리아 서쪽 아드리아 해 연안에서 세력을 키우던 세르비아로 특사를 보내 그들의 군주였던 스테판(Стефан)에게 세르비아 왕의 칭호를 주었다. 세계총대주교는 순식간에 발칸 반도의 교회가 대부분 로마 가톨릭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서방교회 간판을 달게 될까 심히 우려하게 되었다. 이제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세계총대주교 마누일 1세(Μανουήλ Α΄: 1216-1222)는 저명한 수도사였던 사바(Сава)를 세르비아의 대주교로 임명하고 세르비아 교회의 자치권을 인정했다. 사바는 세르비아 왕 스테판의 동생이었으며 정교회 수도원의 본산인 아토스(Άθως) 산의 수도원에 일찍부터 귀의하여 수도사 생활을 한 친(親)동방 성직자였다. 그는 세르비아 왕국과 교회의 행정을 위한 갖가지 준비를 마치고 나서 귀국하였고, 스톤(Ston)이라는 작은 마을에 총주교대리관구를 최초로 세워 세르비아 교회의 독립을 시작하였다. 성인으로 추대된 사바의 성실한 사목 아래 세르비아 교회는 동방 교회의 한 지체로 확실하게 자리잡게 되었고 이는 현재 세르비아 정교회로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세르비아를 돌려놓는 데 성공한 세계총대주교는 이제 불가리아 교회를 돌려놓기 위해 기회를 엿본다. 당시 불가리아 차르였던 이반 아센 2세(Иван Асен II)는 대내외적으로 뛰어난 정치, 외교감각을 보인 훌륭한 군주였는데, 결혼 등으로 복잡하게 엮인 발칸 반도 내의 외교를 적절히 이용하며 제국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불가리아 제국군은 1230년 에피로스 공국과 벌인 클로코트니챠(Клокотниц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황제를 참칭하던 에피로스 공국의 군주인 테오도로스(Θεόδωρος)를 사로잡아 나라를 붕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세르비아에서는 내부 쿠데타를 은밀히 조장하여 자신의 사위가 왕위에 오르게 하는 한편, 딸 옐레나(Елена)를 라틴 제국의 어린 적장자 보두앵 2세(Baudouin II)와 약혼시켜 세르비아와 라틴 제국에서의 영향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1228년, 라틴 제국의 황제 로베르(Robert)가 죽었을때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라틴 귀족들이 이반 아센 2세를 섭정으로 임명할 것을 고려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발칸 반도에서 그의 위세가 가히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보두앵 2세의 섭정으로서 공동 황제에 임명된 것은 과거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었던 장 드 브리엥(Jean de Brienne)이었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이반 아센 2세가 크게 실망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라틴 제국과의 우호 관계를 끊어버렸고, 그 너머에 있는 니케아 제국과 긴밀하게 가까워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니케아 제국의 힘도 점차 커지기 시작했을 때였고, 라틴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는 상태였으니 불가리아 입장에서는 손해 볼 장사가 아니었다. 이반 아센 2세는 콘스탄티누폴리스 공격을 통해 니케아와 함께 힘을 합쳐 라틴 제국을 몰아낼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불가리아 제국이 불온한 행보를 취한다고 판단한 서방교회 국가들은 선제공격을 결심하고, 이윽고 1232년과 1233년 헝가리 군대가 불가리아 침공을 개시한다. 그러나 이반 아센 2세는 이를 모두 격퇴하였고 헝가리에게 빼앗긴 땅을 모두 되찾게 된다. 불가리아 제국은 이젠 완전히 공식적으로 니케아 제국과 손을 잡기로 결심하고 보두앵 2세와 약혼시키려 했던 옐레나를 니케아 제국 황제인 테오도로스 2세(Θεόδωρος Β')와 혼인시켜 니케아 제국과 결혼 동맹까지 성사시킨다.
이렇게 니케아 제국과 불가리아 제국이 정치외교적으로 가까워지자 종교적으로 화합하는 것이 매우 수월해졌다. 결국 1235년 람프사코스(Λάμψακος)에서 세계총대주교 예르마노스 2세(Γερμανός Β΄: 1223-1240)의 주도 하에 공의회가 개최되었고, 모든 동방 총대주교들의 승인 하에서 불가리아 총대주교구가 부활하였다. 부활한 불가리아 총대주교좌에 처음 임명된 사람은 1232년부터 터르노보의 가톨릭 대주교로 섬겨왔던 요아킴 1세(Йоаким I: 1235-1246)였다. 결국 수십년의 우여곡절 끝에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교회가 다시 동방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안그래도 9세기부터 이 지역 포교에 무척 공을 들여왔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실망과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음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동방교회는 오랜만에 승리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윽고 허약했던 라틴 제국은 불가리아 제국과 니케아 제국의 압박 속에서 더욱 흔들리게 되었고, 결국 1261년 니케아 제국의 미하일 8세(Μιχαήλ Η')가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탈환하기에 이른다. 강력한 권력을 쥐고 정복 전쟁을 벌인 미하일 8세 밑에서 동방 교회는 곧 재기에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