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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회 대분열 19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19
러시아 교회의 발전
Rise of Russian Orthodox Church
콘스탄티누폴리스의 함락 이후 실질적으로 동방 정교회를 주도해 온 가장 큰 세력은 바로 러시아 정교회였다. 19편에서는 뒷 이야기를 펼치기 전에 이 러시아 교회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최초의 모스크바 수도대주교인 이오나(Иона: 1448-1461) 이후로 모스크바 수도대주교좌는 모스크바 대공의 정치적 입김에 따라 폐위되는 일이 잦았다. 아직 나라 안에서 종교 권력이 공고하게 바로 서지 못하기도 했을 뿐더러 당시 러시아의 정치 권력 역시 혼돈의 도가니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은 대외적으로 차르국을 표방하며 러시아의 위상을 드높였던 이반 4세(Иван IV)의 치세 때 차르(царь )와 협력하며 세력을 공고히 했던 수도대주교 마카리(Макарий: 1542-1563) 때에야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마카리는 차르 이반의 아주 가까운 조언자이자 후원자였고, 그의 대관식과 결혼 성사를 주관한 사람이었다. 1551년 소위 스토글라비 소보르(Стоглавый Собор)라 불리는 정치 및 종교 인사들의 회의에서 그는 성직자들의 서임에 차르를 비롯한 정치가들이 교권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데 성공, 수도대주교의 위상을 굳건히 지켰고, 러시아의 전통적인 전례 양식이 비록 그리스 정교회의 그것과 다를지라도 유효하다는 선언을 하여 러시아 정교회의 독립적인 위치를 확고하게 하였다. 수도대주교에 대한 차르의 신임이 어찌나 컸던지, 이듬해 카잔(Казань)을 점령하기 위해 이반 4세가 군대를 일으켰을 때, 그는 마카리에게 수도를 맡기며 차르국의 안위를 당부하였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 수도대주교가 1552년부터 1554년까지 모스크바 차르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반 4세는 무시무시한 광기를 가졌던 잔혹한 사람이었다. 1565년, 정적을 감시하고 귀족들 및 지방 영주들의 세력을 억제시키기 위한 비밀 경찰단인 오프리치니나(Опричнина)를 창설한 그는 반대파에 대한 잔혹한 숙청을 단행했으며, 여기에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도대주교 아파나시(Афанасий: 1564-1566)는 이 정책에 항의하는 뜻에서 주교 자리를 내놓고 수도원에 은거(隱居)했으며, 그 뒤를 이은 게르만(Герман: 1566), 필리프 2세(Филипп II: 1566-1568) 역시 차르에게 오프리치니나 폐지를 강력하게 건의했다. 그러나 게르만은 이내 모스크바에서 쫓겨났으며, 필리프 2세는 차르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반 4세의 치세 중 마카리를 제외하고 모두가 그의 광기 아래 신음해야 했고, 수도대주교들은 협박을 받으며 그 갖은 공포를 다 견뎌내야했다. 그 댓가였을까? 이반 4세의 광기는 결국 자기 아들을 지팡이로 때려 죽이는 데에 이르며 다음 차르의 자리는 정치에 관심없고 약간 모자란 표도르 1세(Фёдор I)에게 넘어간다. 그러나 실권은 그의 매부였던 보리스 고두노프(Борис Годунов)가 쥐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 교회는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세계총대주교를 비롯한 동방 총대주교들은 사실상 빈사(瀕死) 상태나 다름 없는 허울 좋은 명예직이었다. 러시아 교회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어머니 교회의 수장인 세계총대주교가 크게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크라이나 교회가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로부터 독립하더니 급기야 로마 교황과의 일치를 선언히여 동방 가톨릭 교회가 되고 말았다(23편에 소개될 예정).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앞마당인 우크라이나가 급격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종교적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자 러시아 교회는 눈 뜬 채로 코가 베이는 듯한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와중에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가 창립한 예수회(Jesuite)가 동유럽 지역에서 선교를 펼치기 시작했고, 이들 중 페트루스 스카르가(Petrus Skarga)라는 수도사는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는 자기 잘못으로 인해 그와 같은 비참한 상황을 맞이한 것이라고 설파하고 다녔다. 이러한 상황들로 인해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대한 모스크바의 감정은 더욱 악화일로에 이르렀다.
왜 모스크바의 주교 총대주교가 될 수 없는가? 이것이 당시 러시아 교회 성직자들과 정치가들의 불만이었다. 러시아 교회의 영향력과 부는 다른 총대주교의 그것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돌이켜 보면 자치 교회로서 총대주교좌로 격상된 예를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두 교회의 수장들도 오스만 제국과 유럽 기독교 국가들 사이의 각축전 속에서 피폐해지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상 소멸되고 말았다. 하지만 현재 러시아 교회는 차르국의 강력한 비호 아래 성장하고 있고, 주변 지역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모스크바 사람 생각에는 어느 면에서나 모스크바에 총대주교좌가 설치되는 것이 지극히 합당하고 온당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이러한 국민적 정서를 이용하여 총대주교좌 격상을 밀어붙여 인기를 얻고 동시에 차르의 권위가 높여지길 원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향수가 강하게 남아있던 정교회 세계에서는 황제는 곧 세계총대주교가 거행하는 성사의 축복을 통해 세워진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고두노프의 계산에 따라 만일 모스크바에 총대주교가 세워지게 되고 그가 대관식을 집전하여 모스크바의 차르를 축복한다면, 그 행사를 통해 러시아의 차르가 과거 비잔티움의 황제와 같은 권위를 갖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모스크바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인 여호아킴 5세(الخامس يهوياقيم: 1553-1592)가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비록 피폐한 경제 사정으로 인해 원조를 구하는 동방 교회의 사제들과 수도사들이 러시아를 방문한 적은 몇 차례 있었으나, 16세기까지 고대 동방 총대주교 중 그 먼 땅 러시아까지 방문한 사람은 이제까지 단 한명도 없었다. 1586년 6월, 모스크바 성직자들은 머나먼 이국 땅을 방문한 총대주교를 존경심을 가지고 따뜻하게 환대하였고, 여호아킴 5세는 차르에게 최상의 사의(謝意)를 표했다. 고두노프와 표도르 1세는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서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격상을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여호아킴 5세가 차르를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경제적 원조를 받기 위해서였다. 당시 안티오키아에 새로운 성당이 세워졌는데, 이로 인해 떠안게 된 부채(負債)를 감당할 수 없었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는 가장 영향력 있던정교회인 러시아 교회에 손을 벌리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가서 금품을 갈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여호아킴 5세는 안티오키아에 소장된 성물(聖物)들을 가지고 갔고, 이에 모스크바는 황금과 갖가지 귀한 선물들로 화답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는 러시아의 화려한 궁정과 귀족들의 생활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특히 러시아 교회의 수장인 모스크바 수도대주교에게 기가 한풀 꺾이고 말았다. 아무리 자신이 총대주교라지만 일개 수도대주교의 권위와 위엄이 훨씬 압도적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보리스 고두노프와 표도르 1세는 총대주교좌 설치를 위해 여호아킴을 상대로 로비를 끈질기게 벌였다. 빚은 질대로 지고 융숭한 대접을 받은 여호아킴으로서는 차르의 호소를 무시할 수도 없는 처사였다. 게다가 그 청을 거절하기에는 이미 러시아 교회의 세력은 너무나도 컸다. 그해 8월 1일, 여호아킴 5세는 다른 총대주교들과 함께 모스크바 주교좌의 격상 문제를 놓고 논의하겠다는 긍정적인 확답을 내놓은 뒤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호위대와 사절단을 같이 딸려 보내 콘스탄티누폴리스와 알렉산드리아에도 값비싼 진상품을 전달하게끔 하여 자신의 목적이 잘 달성될 수 있도록 정성을 쏟았다.
이러한 보리스 고두노프의 수고를 달갑지 않게 바라봤던 사람이 바로 수도대주교 디오니시 2세(Дионисий II: 1581-1587)였다. 디오니시는 총대주교좌 격상을 강력히 밀어붙이는 보리스 고두노프의 속뜻을 간파했던 듯 싶다. 즉, 보리스 고두노프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격상을 성사시키고 그로부터 얻은 인기와 정당성을 기반으로 하여 제위 찬탈을 꾸무는 것이었다. 디오니시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성직자단과 함께 표도르 1세의 이혼을 추진하여 보리스 고두노프를 실각(失閣)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노련한 고두노프는 이들의 책략을 저지하였고 역으로 이들을 궁정에서 내쫓는데 성공한다. 고두노프는 디오니시를 폐위하고 후임으로 이오프(Иов: 1589-1605)를 앉힌다. 고두노프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던 이오프는 정치적 야망이 컸던 사람이 아니었고 고두노프에 특별히 반대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두노프는 디오니시가 걱정했던 바대로 러시아의 차르가 되기 위한 밑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설치에 대해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는 난색(難色)을 표했다. 이미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총대주교좌로 격상시켜 준 경험이 있는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는 그로 인해 오히려 세력이 약화되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데 러시아 교회는 세르비아나 불가리아보다 훨씬 크고 강대한 세력을 가진 교회였다. 러시아 관구를 모두 잃게 되면 비록 명목상일 뿐이더라도 세계총대주교좌의 관할 구역은 정말 보잘것 없이 쪼그라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세계총대주교였던 테오리프토스 2세(Θεόληπτος Β΄, 1585-1586)는 끝까지 이 일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았고, 이에 기분이 상한 러시아 교회는 이후 모스크바를 찾아오는 동방 교회 성직자들과 사절단의 원조 요청을 대부분 거절한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3세(مراد ثالث)가 테오리프토스 2세를 폐위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로 하여금 제국 내 소수민족인 그리스인들을 정치적으로 관장할 권리를 주었기 때문에, 총대주교좌를 차지하려는 정치적인 야심을 가진 사람들은 엄청난 돈을 술탄에게 쥐어주면서까지 로비를 하며 그 자리에 오르려고 했다. 테오리프토스 2세가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가 된 것도 다 그런 돈의 힘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막대한 빚을 지게 된 테오리프토스는 변제(辨濟)할 능력이 없었고, 결국 총대주교좌에서 폐위되었다. 이 과정에서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가 있었던 팜마카리스토스(Παμμακάριστος) 교회는 술탄에게 몰수되어 모스크로 개축되었고, 총대주교좌는 좀 더 작고 보잘것 없는 테오토코스 파라미티아(Θεοτόκος ἡ θπαραμύθια) 교회로 옮겨가게 된다. 그리고 후임으로는 이전에 테오리프토스에 의해 쫓겨났던 총대주교 예레미아스 2세(Ιερεμίας Β΄: 1572-1579, 1580-1584, 1587-1595)가 임명된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아스 2세는 빚더미에 오른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를 다시 일으켜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파탄난 재정을 자체적으로 메울 길은 없었다. 오직 원조만이 구할 길이었는데, 결국 원조를 구할 상대는 러시아 교회밖에 없었다. 예레미아스 2세는 술탄의 동의를 얻어 러시아를 향해 떠났다.
세계총대주교의 방문 소식에 모스크바의 첫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들이 알기로는 세계총대주교가 테오리프토스 2세인데 왜 과거에 쫓겨났다고 알려진 예레미아스 2세가 모스크바로 들어와 구걸을 하려는 것인가? 러시아 정부는 군사를 먼저 보내 충분히 조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예레미아스 2세가 합법적인 세계총대주교임을 확인한 뒤에야 차르는 예레미아스 2세의 모스크바 입성을 허가했으며, 몇 명의 대주교와 주교들, 그리고 귀족들을 먼저 보내 역사상 최초로 모스크바 땅을 밟는 세계총대주교를 환영하게 하였다. 이 때가 1588년 6월의 일이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이번 세계총대주교의 방문이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격상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다시는 오지 않을 호기라고 여겼다. 그는 여호아킴 5세와는 달리 예레미아스 2세를 사실상 왕궁 연금(軟禁)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어느 누구도 공적인 허가 없이 세계총대주교를 만날 수 없었다. 또한 여호아킴이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예레미아스 2세에게도 역시 화려한 궁정의 모습과 위엄 가득한 성당을 보여줌으로서 러시아 교회의 권위에 압도당하도록 하였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 예레미아스 2세는 콘스탄티누폴리스로부터 진귀한 성물들을 차르 표도르 1세에게 바쳤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표도르 1세 역시 예레미아스에게 값비싼 보물들과 화려한 의복, 그리고 돈을 쥐어주었다. 물론 그 이후에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설치를 위한 로비를 시작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러시아 교회의 훌륭한 모습에 감탄한 예레미아스 2세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그는 콘스탄티누폴리스 뿐 아니라 모스크바의 총대주교가 되었으면 하는 야심이 있었다. 두 총대주교좌를 차지한다면 그의 영향력은 곱절이 될 것이며 더 이상 오스만 제국의 압제 하에서 술탄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지 않은가? 예레미아스 2세는 모스크바에 계속 체류하겠노라고 선언했고, 지속적으로 표도르 1세와 보리스 고두노프의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세계총대주교의 속셈을 진즉 알아챘던 러시아 교회측은 모스크바에 총대주교가 임명된다면 그는 모스크바 수도대주교좌 및 귀족원과 떨어진 러시아 차르국의 옛 수도인 블라디미르(Владимир)에 거주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연금 상태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예레미아스는 당황하게 되었다. 블라디미르는 모스크바로부터 200 km 정도 떨어져있는데, 비록 역사적인 가치는 높았던 러시아의 고도(古都)였을지라도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모스크바보다 한참 역량이 떨어지는 이 도시에서는 예레미아스가 생각한 것과 같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했다. 미끼에 걸려 함정에 빠진 것을 뒤늦게 안 예레미아스에게 차르의 압박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1589년 1월, 표도르 1세는 귀족 의회인 두마(дума)를 소집하였고, 보리스 고두노프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 하지만 예레미아스는 블라디미르 총대주교좌를 원치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수도대주교 이오프가 현재 거하고 있는 모스크바에 총대주교좌를 만들어 예레미아스에게 넘긴다면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격상에 관한) 우리의 의지는 실현될 테지요. 하지만 이것은 온당치 못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기적을 행하는 표트르, 알렉세이, 이오나, 존귀한 사람들, 그리고 거룩하고 존경받는 신부이자 중보자인 수도대주교 이오프를 내쫓고 거기에 그리스 사람을 앉히겠습니까? 게다가 예레미아스는 우리 풍습도 모르고 러시아 말도 할 줄 모르며 통역가 없이는 어떠한 종교 관련된 문제에 대해 논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일과 관련해서 세계총대주교가 블라디미르와 모스크바의 총대주교로서 우리 러시아 성직자단의 한 사람이자 중보자인 이오프를 서품해 주게끔, 그리고 그의 지위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총대주교좌와 같은 등급이 되게끔 해줄 것을 계속 논의할 예정입니다. (중략). 또한 우리 성직자 서품권도 얻어내어 러시아의 수도대주교와 대주교, 주교들을 임명할 수 있도록 할텐데, 이렇게 되면 우리 도시들에 주교의 수를 늘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윽고 고두노프는 러시아인 총대주교를 서품해 달라는 차르의 명을 받들고 예레미아스를 알현(謁見)하였다. 예레미아스는 이 제안 아닌 협박을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결국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예레미아스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크게 당한 꼴이었고, 이미 러시아 교회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어야 할 책무마저 느끼게 할 정도로 너무 많은 미끼를 물었던 것이다. 예레미아스는 모스크바 수도대주교좌를 총대주교좌로 격상시킴과 동시에 노보그라드(Новгород)와 로스토프(Ростов)의 주교좌를 수도대주교좌로 승격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신품(神品) 성사는 러시아 교회 전례 양식을 따르기로 하였는데, 이는 러시아 교회 전통의 독립적인 형태를 그대로 승인해 준다는 함의(含意)가 있었다. 성사가 끝난 뒤에야 예레미아스는 콘스탄티누폴리스로 귀환할 수 있었으며,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는 러시아 관구를 독립시켜주고 난 뒤 더욱 초라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표트르 1세는 후사 없이 1598년 사망하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전국회의에 해당하는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를 소집하였고, 여기서 가장 권세가 있었던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로 선출된다. 그는 영토를 성공적으로 늘리는 등 좋은 치세를 펼치는 듯 했지만, 류리크 왕조(Рюриковичи)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많은 러시아 귀족들의 반감을 샀으며, 이윽고 자연재해과 기근, 질병이 유행하게 되면서 인기가 곤두박질치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유일한 아들인 표도르 2세(Фёдор II)가 차르가 되지만 차르의 자리를 찬탈한 자의 아들이 차르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반감이 점차 전국을 뒤덮었고, 이는 류리크 왕조의 후예라고 알려진 드미트리 우글리츠키(Дмитрий Углицкий)를 참칭하며 차르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모스크바에 등장함으로서 상황이 더욱 복잡하게 꼬이게 되었다. 차르의 권위가 상실된 상황에서 러시아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챙기기 위해 서로 싸움을 벌였고, 하층민들 역시 과격하게 내란에 동요하면서 러시아 차르국 자체가 크게 뒤흔들리게 되었다. 급기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인 지그문트 3세(Zygmunt III)는 러시아 사태에 개입하기로 결정하였고 1609년에는 모스크바를 점령하여 2년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폴란드의 내정 간섭과 모스크바 점령은 러시아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 혼란의 시기로 인해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역시 출범된 지 얼마 안 되어 위기에 휩싸였다. 가짜 드미트리를 지지한 이그나티(Игнатий: 1605-1606)는 훗날 정통성을 의심받는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 뒤를 이은 게르모겐(Гермоген:1606-1612)은 모스크바에 난입한 폴란드인들에 대한 협조를 일절 거부했으며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끝까지 폴란드인들에 맞섰다. 1610년에 그는 러시아 각지에 서신을 회람시켜 폴란드에 저항하기 위해 궐기할 것을 촉구하였는데, 한낱 교회의 수장이 이렇게 군사력까지 동원하면서까지 폴란드군에 저항하고자 했던 것에는 그들이 단순히 외세라서라기보다는 그들이 폴란드에서 온 로마 가톨릭 교도였기 때문이었다. 사형당할 것이라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 가톨릭을 저주하였고, 민병대를 조직하고 모스크바를 탈환하러 온 프로코피 랴푸노프(Прокопий Ляпунов)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수도원에 유폐되어 혹독한 시간을 보내게 되지만, 뒤이어 의용대를 조직한 대공 드미트리 포자르스키(Дмитрий Пожарский)를 축복한 일로 인해 결국 거기서 순교하게 된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은 러시아 민족주의를 자극하였고, 흔히 동란 시대(Смутное Время)라고 불리는 이 혼란의 시기는 1613년 미하일 1세(Михаил I)가 젬스키 소보르에 의해 차르로 선출되면서 겨우 수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하일 1세의 아버지였던 필라레트(Филарет: 1619-1633)가 모스크바 총대주교좌에 오르게 되어 러시아 교회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된다.
이런 혼란을 딛고 17세기 러시아 차르국과 교회는 경제적으로 더욱 부유해졌고, 영향력도 높아지게 된다. 이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에 놓여있던 우크라이나를 병합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에서 카자크들(Казаки)10의 봉기로 인한 내분이 일어났을 때 여기에 개입하여 이권을 챙겼으며, 우크라이나는 양분되어 서부는 폴란드의 지배 하에 놓이고, 동부는 차르의 종주권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키이우(Київ) 수도대주교좌에 대한 사목권이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에서 모스크바 총대주교좌로 넘어가게 되었다. 수백만명의 신자들과 많은 교구들이 모스크바 총대주교 관할이 되었으니 러시아 교회로서는 엄청난 세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11 이 역시 23편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질 내용이다.
그런데 당시 우크라이나 교회는 브레스트(Брест) 연합 조약 이후로 로마 가톨릭과 종교 개혁, 그리고 그에 따르는 반종교 개혁의 영향을 크게 받은 상태였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지리적 위치는 그리스 정교회 세계에 훨씬 가까웠고, 1551년 러시아 교회의 스토글라비 소보르에서 러시아 고유 전례를 합법화하는 결정이 내려질 당시 러시아 교회 관할 교구가 아니었으므로 비잔티움 양식의 전례가 비교적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교회는 새로 주인이 된 러시아 교회에 극한 이질감을 느낄 가능성이 있었다. 더구나 사목권의 이양이 우크라이나 교회의 자체적인 결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러시아 차르국, 그리고 오스만 투르크의 정치군사적 세력 다툼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러시아 교회는 새로 획득한 우크라이나 교회를 제대로 잘 대우해주지 않으면 다시 자신들의 품을 떠나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 소속으로 돌아가거나 자치 교회 설립을 주장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러시아 교회와 우크라이나 교회를 어느 정도 일치시켜 차이점을 최소화하는 것이 러시아 교회의 영향력을 유지 및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모스크바 총대주교였던 니콘(Никон: 1652-1658)은 우크라이나 교회를 어떻게 하면 러시아 교회에 순종적으로 만들것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우크라이나 교회 문제가 잘 풀리지 않게 될 경우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권위가 손상될 것을 우려했다. 어떻게 하면 우크라이나 교회를 달랠 수 있을까?
니콘은 이 문제를 능란하게 러시아 교회 개혁과 연결지어 한꺼번에 해결하고자 하였다. 러시아 교회의 전례 양식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일부 면에서는 비정통적인 것이라고 주장한 니콘은 이 모든 문제가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와 분리된 채 자주 통교(通交)하지 못하고 지내온 까닭에 러시아의 해악스러운 이교도적 전통이 교회에 유입된 결과라고 해석했다. 그는 이 사태를 바로잡기 위해 정교회의 본산인 그리스 교회의 양식과 비슷하게 전례 양식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당시 러시아 교회가 지나친 형식주의와 사제들의 낮은 교육 수준, 빈익빈 부익부 사회 구조에서 오는 모순 등으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크라이나 교회와 의례를 비슷하게 하여 이질감을 최소화하고 우크라이나 교회에 대한 사목권을 확고부동하게 해 놓는 것에 있었다. 이러한 니콘의 개혁은 우크라이나를 정치적으로 완전히 병합하길 희망하는 정치가들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았는데 특히 차르 알렉세이 1세(Алексей I)가 그러했다.
그렇다면 니콘의 개혁은 어떠했는가? 사실 다른 이들이 볼 때에 그의 개혁으로 인한 변화는 그렇게 큰 변화가 아니었다. 우선 예수의 철자가 이수스(Ісусъ)에서 이이수스(Іисусъ)로 바뀌었다.13 몇 가지 풍습도 고쳐졌다. 과거에는 인지를 세우고 중지는 약간 굽힌 뒤 나머지 세 손가락을 모아서 성호를 그었으나 새 방침에 따르면 비잔티움 방식을 따라 삼위일체를 상징하기 위해 엄지와 인지, 중지를 한 데 모으고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의미하는 약지와 소지(小指, 새끼손가락)는 모아서 손바닥에 붙여서 성호를 긋는다. 종전에 두 번 부르던 알릴루이야(Аллилуїa)는 세 번으로 고쳐졌으며, 성찬 예배 때 제공되는 빵인 프로스포라(просфора)는 빵 7개에서 5개로 줄었다. 기도문에서 '하느님 아버지'는 보다 친근감이 덜한 '하느님'으로 고쳐졌고, 니카이아-콘스탄티누폴리스 신경에 '진실되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번역은 오역으로 판명되어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다듬어졌다. 성경의 번역 역시 잘못된 부분이 수정되었는데 주로 그리스어 성경과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가 가진 지침에 따라 진행되었다.
전례의 형식을 모두 망라한 기도서는 이미 이전 총대주교였던 이오아사프 1세(Иоасаф I: 1634-1640)에 의해 개정된 적이 있었지만, 1654년과 1656년, 두 차례에 걸친 주교 회의는 기도서가 러시아 전통보다는 비잔티움 양식에 따라 더 개정되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니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성당의 지붕 양식은 돔 형태의 과거 비잔티움 양식을 따라야 한다고 설파했으며 기존에 지어진 뾰족한 형태의 성당 지붕을 모두 허물고 새로 지을 것을 주장하였다. 덧붙여 이콘의 양식 역시도 러시아 전통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러시아 풍습과 양식이 부정되었으며, 오직 과거의 비잔티움 스타일이 옳고 바른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니콘의 독선적이고 급진적인 개혁 방식은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전 계급적, 전국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수석사제였던 아바쿰(Аввакум)을 필두로 하여 수많은 사람들, 특히 극심한 성차별 속에서 기독교 전례에 심취하여 안식을 찾았던 귀부인들이 특히 이 니콘의 개혁에 반발하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러시아 성직자들의 교육 수준은 낮았기 때문에 니콘의 개혁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이 적었다. 수구적인 태도로 일변한 이들은 대부분 새로운 전례와 의식을 익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거부감을 표했고, 그리고 그 모든 개혁이 지금까지 옳고 바르다고 여겼던 전통적인 러시아 의례를 철저히 부정한다는 사실에 경악하였다. 하루아침에 옳다고 여겨온 전통과 의식이 부정되자 사람들은 총체적인 혼돈 상태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이 우크라이나를 통해 들어온 서구권의 신학, 그리고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비잔티움 문화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분노하였으며, 이에 따라 외국 문화에 대한 혐오감이 일시적으로 높아져갔다. 성직자들간에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니콘의 개혁이 신앙의 변개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총대주교 니콘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보수적인 귀족 및 성직자 세력은 평민 출신으로 가장 높은 총대주교좌에 오른 니콘과 차르의 지원 하에 벌이는 그의 개혁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런 사실을 뻔히 아는 니콘 역시 그들을 적대시하면서 자신이 가진 총대주교로서의 종교적인 권위를 더 대담하게 내세우며 맞섰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총대주교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추방하거나 파문함으로써 개혁에 대한 의지를 더욱 굳건히 세웠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니콘 주변에는 그를 음해하려는 정적이 더욱 가득해졌다. 생각보다 개혁에 따르는 피로도가 너무 높다는 것을 알게 된 알렉세이 1세도 로마 교황처럼 종교적 권위를 내세워 차르를 압도하려는 총대주교 니콘을 더 이상 지지할 수 없었다. 이에 실망한 니콘은 1658년 돌연 사직을 선언하고 수도원에 틀어박혀 총대주교직 파업 시위에 돌입한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러시아 교회와 행정부는 당황하게 되었고 총대주교좌는 2년간 공석이 되었다. 그 자리는 총대주교서리로서 피티림(Питирим: 1672-1673)이 맡게 되었으나 공식적인 수장이 없었던 상태였으므로 러시아 교회 상태는 엉망이 되고 만다. 안 그래도 니콘이 내놓은 개혁안 때문에 교회가 뒤숭숭한데 책임질 사람은 교회를 떠나가 수도원에 칩거하고 있으니 어느 누구도 권위를 가지고 교회의 일을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우물쭈물하던 러시아 교회는 결국 1666년이 되어서야 모스크바에서 주교 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러시아 교회 요인들 뿐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까지 초대되었고, 세계총대주교와 예루살렘 총대주교를 대신하는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개최되었던 정교회 세계에서의 세계공의회급(及)의 주교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동방 주교들은 차르의 뜻대로 문제 많은 모스크바 총대주교 니콘을 폐위시켰다. 그러나 동방 교회 주교들은 니콘의 개혁만큼은 명분이 있다고 보아 열렬히 지지했고, 1551년 이반 4세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교회법인 스토글라프(Стоглав)가 러시아 전통 전례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이단 문서로 판정하여 참고를 금지시켰다. 더불어 니콘의 개혁에 반대했던 아바쿰을 비롯한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을 파문하고 처형 및 추방하였다. 러시아 전통 예전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들이 큰 박해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성직자들은 여전히 개혁 이전의 의식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니콘의 개혁이 매우 사악하고 악마적인 것이라고 저주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분신을 하며 주교 회의의 결정을 저주하였다. 이들은 모스크바 총대주교와의 상통을 끊어버리고 독립된 교회로 남아 이전의 전통과 예전을 지키기로 결의했는데, 그러한 사람들을 스타로오브랴트체스트보(Старообрядчество),15 즉 '구교도(old believers)'라고 불렀으며 이 때의 러시아 교회의 분열을 라스콜(раскол)이라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피해 모스크바를 떠나 주로 차르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시베리아, 북부의 숲으로 도망갔고 심지어 국외로 도피하는 경우도 많았다. 러시아 정부는 이들을 '분열을 획책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라스콜니키(раскольники)라고 멸칭하며 박해를 계속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1971년 모스크바 주교회의에서 구교도들에 대한 저주를 철회하고 화해를 요청하면서야 비로소 해소되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병합에 따라 촉발된 니콘의 교회 개혁, 그리고 그로 인한 러시아 교회의 혼란은 결국 총대주교좌의 붕괴로 이어지게 된다. 우크라이나로부터 들어온 서방 세계의 사상과 철학, 진보된 기술은 몽골 및 중앙 아시아의 색채가 짙던 러시아의 전통적인 사상과 문화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충격이었으며 지식인들과 상류층을 중심으로 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유능한 차르 표트르 1세(Пётр I)는 러시아의 근대화 및 서유럽화를 추진했으며 이것은 군사적인 성공으로 이어져 북방전쟁(Северная война)에서 스웨덴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둬 발트해로 진출, 유럽 열강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후 1721년에 비로소 러시아의 차르는 황제를 칭했고, 이는 폴란드와 프로이센, 스웨덴으로부터 인정받기에 이른다.
표트르의 개혁은 이제 교회로 향했다. 표트르의 서유럽화는 정교회의 관습과 전통과는 배치되는 점이 많았다. 단적인 예가 표트르 1세가 러시아 신민들로 하여금 수염을 깎게 하고, 수염을 기른 자에게는 세금을 매기는 법안을 실행시킨 것이었다. 정교회 성직자들은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과는 달리 수염을 깎지 않는데 이는 사제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예수 역시 수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 내용처럼 수염을 깎는 것이 이교도들의 풍습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초대 교회로부터 많은 사도들과 교부들이 수염을 깎지 않고 두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표트르 1세가 위로부터 고관대작들의 수염을 깎게 하고 평민들도 수염을 깎게 하니 정교회 성직자들이 이 상황을 두고 개탄할 수 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니콘의 개혁으로 인해 서유럽 문화에 대한 반발이 강했는데, 표트르 1세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이와 같은 세속적인 개혁을 추진하니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우려는 더욱 심각해졌다. 총대주교 이오아킴(Иоаким: 1674-1690)과 아드리안(Адриан: 1690-1700)은 황제의 권위로부터 교회를 지키려고 애썼으나 급속도로 팽창하는 황제의 권력을 막을 수가 없었다. 급기야 1700년 총대주교 아드리안이 죽고 나서부터는 21년간 새로운 총대주교 선출을 금지했으며, 우크라이나 출신의 스테판 야보르스키(Стефан Яворский)를 총대주교서리로 삼아 교회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표트르 1세의 개혁은 서구권 및 북유럽 루터교 국가들의 국가-교회 관계를 참조한 것이었다. 표트르는 부강한 유럽 열강의 축에 끼기 위해서는 교회의 간섭이 최소화된 세속화 된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절대왕정을 완성한 프랑스의 경우 가톨릭 교회의 세속 정치에 대한 영향력이 급속도로 축소된 상태에서 유럽 최강국의 지위에 올랐고, 북방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기 전에는 특히 루터교 국가인 스웨덴이 발트 해 지역의 최강국이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루터교는 국가 교회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는데, 이들 교회는 국가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모양새였다. 또한 영국 교회는 개혁을 통해 왕을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 인정하는 수장령(首長令, Acts of Supremacy)을 반포하였고 대영 제국은 스페인과 프랑스를 뒤이어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나라를 만들어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1711년 표트르 1세는 국가 의회에서 성직자를 비롯하여 모든 신민(臣民)들에 대한 심사를 진행할 수 있다고 선포하였는데 이는 교회를 국가의 감독 하에 두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리고 1716년에는 주교로 선출되는 성직자들에게 요구되는 선서문을 직접 작성하였는데 여기에는 불필요하게 교회를 짓지 않을 것, 성직자 수를 늘리지 말 것, 그리고 세속적인 일에 간섭하지 말 것을 맹세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일련의 개혁 과정으로 인해 모스크바 총대주교를 정점으로 한 교회 권력 구조가 붕괴되고 말았다. 시일이 지나 교회 권력의 해체가 표면화 되었을 때, 황제는 1721년 마침내 모스크바 총대주교좌를 폐지하고 신성종무원(Святейший Правительствующий Синод)이라는 기구를 설립하여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신성종무원의 초대 의장은 스테판 야보르스키였으나, 일련의 개혁을 조언하고 황제와 협력한 부의장 페오판 프로코포비치(Феофан Прокопович)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스테판 사후 페오판은 1725년 러시아 교회의 주요한 대주교좌인 노브고로드의 대주교로 취임하여 표트르 대제가 진행했던 교회 개혁을 계속 책임지게 되었다.
한편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수도대주교좌 및 대주교좌로 격하된 것 이상으로 가장 중요한 변화가 표트르 대제 재위 시절에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천도(遷都)였다. 표트르 대제는 발트 해 진출을 매우 중시하여 불모지였던 땅에 제국의 역량을 쏟아 새로운 수도를 지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 건설에 참여하게 되었고 도중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노예들의 뼈 위에 세금을 늘리고 교회의 재산도 몰수하면서까지 세운 이 도시가 바로 표트르 대제의 이름을 딴 상트페테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713년부터 러시아 제국의 수도가 되어 200여년간 러시아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신성종무원의 창설과 함께 종교적 역량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집중되었다. 그 결과 과거 노브고로드 관구에 속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1742년 독립된 주교좌가 설치되었고 얼마 안가 독립적인 관구를 가지는 대주교좌로 승격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주교는 신성종무원에서 가장 중요한 일원이었으며 마치 로마 제국의 수도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옮겨졌을 때와 비슷한 권력 관계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는 여전히 러시아 정교회의 중심지로 늘 기억되었고, 러시아 제국이 2월 혁명(Февральская революция)에 의해 종말을 고한 1917년, 교회 회의에 의해 재빨리 복구된 것이 바로 모스크바 총대주교좌였다. 그리고 티혼(Тихон: 1917-1925)이 거의 200년만에 모스크바 총대주교 자리에 올랐다. 러시아 정교회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부활을 통해 대내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Prolétariat) 혁명을, 대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어지러운 러시아의 혼란상을 수습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의 사회주의적 반종교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 정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박해에 시달려야 했으며 교회가 분열되고 특히 해외로 망명한 러시아 교회 일원들이 러시아 교회와의 상통을 끊어버리고 독립하는 아픔마저 겪게 되었다.18 성직자들은 소비에트 정부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처형당하거나 고문당했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폐쇄되었다. 이러한 탄압은 너무나도 극심하여 한 때 3만여개의 교회가 있었던 러시아 땅에는 이제는 500개도 채 안 되는 교회만이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종교적 열심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기를 기도했던 이오시프 스탈린(Иосиф Сталин)의 종교 완화 정책으로 다소 누그러진다. 여기에는 소비에트 정부에 적극 협조할 것을 천명한 총대주교 세르기(Сергий: 1943-1944)와 알렉시 1세(Алексий I: 1945-1970)의 노력이 컸으며 교세는 다시 확장되었고, 신학교들도 문을 열어 신학자들을 양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Никита Хрущёв)가 공산당 서기가 되어 교회 박해를 다시 진행했고, 1957년 다시 22,000개까지 늘어났던 교회의 수는 다시 7,000개 이하로 감소하였다. 1953년 모든 동방 교회 수도원은 문을 닫게 되었고, 신학교 역시 폐쇄되었다. 무신론을 반대하는 것은 범죄로 여겨졌고, 기독교와 연관되 모든 의식과 행사는 금지되었다. 또한 아이들에게 종교를 교육하거나 성찬례에 참여시키는 행위는 범법 행위로 처벌받았는데, 아이들로 하여금 교회에서 멀어지도록 하는 조치들은 교회의 싹을 미리 잘라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이 기간동안 러시아 정교회는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보안위원회(КГБ)의 하수인 노릇을 했으며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
이 모든 어려운 상황이 해결된 것은 사회주의의 한계로 인해 소비에트 정부가 소위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 및 글라스노스트(Гласност)라고 불리는 개혁, 개방 정책을 펼치면서부터였다. 미하일 고르바초프(Михаил Горбачёв)는 1990년 '양심의 자유와 종교 조직에 관한 법'을 통과시켜 마침내 러시아 정교회의 자유로운 활동을 인정했고,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뒤 러시아의 첫 대통령으로 취임한 보리스 옐친(Борис Ельцин)은 총대주교 알렉시 2세(Алексий II: 1990-2008)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집전한 미사에 참석할 정도였다. 기나긴 박해 끝에 러시아 정교회는 과거의 어두웠던 역사를 털어버리고, 비상하는 러시아 국력에 발맞추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능력 있는 정교회로 변모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