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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역법(曆法)은 그레고리력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Gregorius XIII: 1572-1585)가 개정한 역법을 따르고 있다. 그레고리력은 태양력(太陽曆)으로, 태양의 움직임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1년의 주기로 하여 약 356일이 1년이 되는 것을 골자로 한 뒤 윤년을 도입하여 정립한 달력이었다. 과거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을 사용하던 우리 나라가 그레고리력을 전격 도입한 것은 1895년 을미개혁(乙未改革) 때였으며 그때까지 정식으로 채택하여 쓰고 있었던 음력의 일종인 시헌력(時憲曆)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였다. 한편,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전세계 사람들이 모두 그레고리력을 쓰지는 않는다. 무슬림들은 히지라력(التقويم الهجري)을 쓰고,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에티오피아력(የኢትዮጵያ ዘመን አቆጣጠር)을 쓴다. 과거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10일을 1주로 계산하는 프랑스 혁명력을 채택했던 역사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레고리력은 어떻게, 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 그레고리력을 교황이 만들었다는데 기독교와 무슨 관련이 있었다는 것일까?
기독교 세계의 역법은 어떻게 변화하였을까? 기독교의 원류는 유대교이므로 유대교의 역법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역법은 최초에는 태음력이었으나 바빌론 유수 이후 신(新)바빌로니아의 역법을 채용하여 태음태양력을 도입하였고, 이는 359년 유대인 최고 의결 회의인 산헤드린(סנהדרין)에서 확정되어 지금에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히브리력이라고도 불리는 유대력은 과거와는 순서가 달라졌지만 성경에 나와있는 순서를 따르면 다음과 같다.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
니싼 | 이야르 | 시반 | 타무즈 | 아브 | 엘룰 | 티쉬리 | 헤시반 | 키슬레브 | 테벳 | 쉬밧 | 아다르 |
니싼월을 정월(正月)로 지킨 것은 이 달 보름에 과월절(過越節)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것은 구약 시대에 모세에게 전달된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였다.1
그런데 잠시, 동양 사람들도 그렇고 유대인들은 왜 태음태양력을 썼을까? 사람들이 처음부터 음력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시간이라는 것은 돌고 돌았다. 해가 뜨면 낮이었도 해가 지면 밤이 되며 시간이 흘러가면 이러한 상황은 반복되었다. 사람들은 자연히 해가 뜨고난 뒤 져서 다시 뜰 때까지 한 낮과 한 밤를 아울러 '하루'의 길이로 정의하였다. 그런데 밤마다 하늘을 보니 낮에는 밝아서 잘 관찰하기 힘든 광명체와는 달리 밤의 광명체는 시간이 지날 때마다 그 모양이 바뀌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매일매일 그 모양이 변하는 것이 신기해서 관찰해보니 한 28-29일 정도 지나면 아무 것도 없던 것이 보름달이 되었다가 다시 아무 것도 없게 된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이 주기에 맞춰서 밀물과 썰물에 차이가 주기적으로 생기는 것도 경험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이것은 한 '달'로 정의되었다.
사람들이 느끼는 또다른 주기는 바로 계절의 변화였다. 꽃이 피더니 몇 달이 지나면 지고 눈이 몰아쳤다가 또 몇 달이 지나면 다시 날이 풀린다. 이것은 한 '해'로 정의되었다. 그런데 이 계절은 달의 변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보였다. 딱 맞아떨어지지도 않았고 매해 들쭉날쭉했다. 이미 경험적으로 눈치챘듯이 이러한 계절 변화를 관장하는 것은 태양이었는데 사람들이 유심히 태양의 움직임을 관찰한 결과 약 365일 해가 떴다 졌다를 반복하면 계절이 한번 돌아 원래대로 다시 돌아옴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태양력은 태음력에 비해 계절을 잘 설명해주는 장점이 있었고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아주 요긴하게 쓰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 어느 사람이 태양의 고도와 위치를 따져가며 오늘이 276일째다, 316일째다 이렇게 말하겠는가. 달의 위상을 보면 분명히 크게 반복되는 주기(달) 중에서 13일째 혹은 22일째임을 알 수 있었고 이렇게 날짜를 말하느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날짜를 말할 때에는 음력에서 차용했던 달의 개념을 같이 껴맞추었다. 이것이 바로 고대 세계로부터 태음태양력이 많이 사용되었던 이유였다.
로마 제국은 어떠했을까? 로마는 시조라 불리는 로물루스(Romulus) 형제가 채택했던 지역 달력을 사용하였는데 기본적으로 태음력이었으며 10달로 이뤄진 매우 조악한 달력이었다. 매해의 시작은 뒤죽박죽이었고 또 달력으로는 계산되지 않는 공백기간이라는 아주 기괴한 전통이 있었다. 이것은 훗날 두 달을 추가하여 12달을 만들면서 사정이 나아졌지만 태음력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실제 태양년에 비해 10일이나 부족한 355년을 1년으로 계산하고 있었고 나중엔 이 오차가 누적되어 달력과 계절이 전혀 안 맞는 문제가 생겼다. 게다가 윤달을 넣고 빼는 치윤(置閏)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상태는 더욱 엉망이 되었다.
이 난제를 효과적으로 개정하고자 팔을 걷어붙힌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롬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였다. 달력을 제대로 지키는 것은 종교적 의례를 위해 중요할 뿐 아니라 세금을 잘 걷기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 당시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석권하여 고대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레이아(Αλεξάνδρεια)를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그 덕분에 거기서 활동하던 천문학자 소시게네스(Σωσιγένης)의 활약으로 달력을 효과적으로 개선할 수 있었다. 소시게네스는 태음력을 완전히 포기하였으며 그 결과 탄생한 율리우스력은 완전한 태양력이 되었다. 그 당시 천문학자들의 측정에 따르면 1태양년은 365.25일이었으니 매해를 365로 설정하면 4년마다 하루가 뒤쳐지게 되었으므로 율리우스력에서는 4년마다 윤일을 하루 두게 하였다.
문제는 태양력을 사용하는 로마 제국이 태음태양력을 사용하던 유대인들로부터 파생된 종교인 기독교를 공인하면서부터 발생했다.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율법에 따라 적시에 적합한 행동을 하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다. 때문에 교회력의 중요한 절기들을 잘 지키는 것이 전통으로 간주되었는데 도대체 그게 제국에서 채택한 태양력으로는 언제에 해당되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해진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절기, 곧 부활절은 성경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유대교 명절인 과월절이 있었던 그 주의 안식일 다음날이었다. 왜냐하면 최후의 만찬은 과월절 즈음에 이뤄졌고, 예수는 그 뒤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한 뒤 유다의 배반에 의해 잡혀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의 명에 따라 십자가형을 언도받는데, 성경에서는 아리마테아(Αριμαθαία)의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안식일이 밝아오기 전에 미리 받아 서둘러 매장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3 예수가 부활한 날은 그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이니 안식일 다음날, 곧 일요일이었다.
그렇다면 과월절은 언제인가? 다시 구약 성경 출애굽기(탈출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너희는 그것을 이 달 십 사일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모여서 해질 무렵에 잡도록 하여라. 그리고 그 피를 받아, 그것을 먹을 집의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上引枋)에 바르라고 하여라. 그 날 밤에 고기를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도록 하는데, 날로 먹거나 삶아 먹어서는 안 된다. 머리와 다리와 내장도 반드시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 그것을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도 안 된다.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살라 버려야 한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나 야훼에게 드리는 과월절이다. 4
이 기록에 따라 해석하자면 니싼월 14일 밤이 과월절이 된다. 그런데 유대력은 앞서 말했듯 태음태양력이었기 때문에 니싼월이 태양력으로 몇 월 몇 일이 되는지 불분명했다. 게다가 태음태양력의 치윤은 19년 동안 7번씩 행해졌는데, 당시 율리우스력과 완전히 호환되는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정확한 양력 날짜를 알 수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단서가 될만한 풍습이 유대 민족에게 있었으니 바로 과월절 이튿날에 보리 이삭을 한단 묶어서 흔들어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5 농사는 계절 의존적이므로 태양력을 가늠하게 하는 일종의 지표였고, 일반적으로 보리 이삭이 보이는 시기는 봄 중 낮과 밤의 길이가 일치하는 시기, 곧 춘분(春分)에 해당하였다. 따라서 니싼월은 태양력으로 계산한 춘분이 있는 태음력 달이었으며, 과월절은 그 니싼월의 14일째였으며, 그날은 곧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다.
초대 기독교 시기에는 지중해 전역에 퍼져 있는 유대인들의 달력을 참조해서 부활절을 지켰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한 날을 태음력의 '날짜'에 고정시켜야 하는 것인지 혹은 태양력의 '일요일'에 고정시켜야 하는 지가 논쟁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유대인들의 태음태양력은 어딘가 모르게 불완전했다. 치윤 때문에 어느 해의 부활절은 춘분 이전이었다가 어느 해의 부활절은 춘분 이후일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유대력의 오차는 약 220년당 1일 정도였으므로 3세기에 이르러서는 예수 활동시기에 비해 하루 정도의 차이가 이미 발생한 시점이었다.
사실 동서교회 간의 극심한 분쟁은 앞서 소개한 수많은 에피소드들보다도 훨씬 앞서는 서기 2세기 경에 먼저 있었으니 바로 부활절 날짜에 관한 논쟁이었다. 일찍부터 율리우스력이 확고하게 사용된 로마를 비롯한 서방 교회에서는 부활절 날짜를 태양력에 맞추었고, 부활절이 일요일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되 니싼월 보름날을 고려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춘분 이후 보름달이 뜨는 그 주의 다음 일요일을 부활절로 정해서 이를 기념했다. 이에 반해 동방 교회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태음력을 채택하여 니싼월 14일째를 무조건 부활절로 지정하여 기념했다.6 이러다보니 동방 교회의 부활절은 요일과는 상관이 없었다. 이러한 풍습의 차이가 최초로 인식된 것이 서기 120년의 일로, 로마에 있던 소아시아 교인들이 고난주간동안 금식하고나서 축제에 들어갔을 때 정작 로마 교인들은 일요일까지 금식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가장 중요한 절기의 날짜를 다르게 지킨다는 것을 깨달은 동서교회는 교회력 통일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동방 교회의 순교자인 스미르나(Σμύρνα)의 주교인 폴리카르포스(Πολύκαρπος)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에 찾아가서 교황 아니체토(Anicetus: 155-166)을 만나 논의했다고 한다. 논의는 꽤 긍정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아쉽게도 이 문제에 관한 확실한 결론이 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교황 빅토르 1세(Victor I: 189-198) 재위 때 문제가 불거진다. 빅토르 1세는 193년에 로마에서 주교 회의를 열어 모든 교회가 로마 교회의 풍습대로 춘분 이후 보름달이 뜨는 그 주의 다음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지중해 세계에 퍼져나가자 비슷한 시기에 로마 외에도 다른 지역에서도 이 주제를 논하기 위한 주교 회의들이 개최되었다. 몇몇 주교 회의는 로마의 입장에 찬동하는 결정을 내렸다. 예를 들어 팔레스타인에서는 아일리아 카피톨리나(Αιλία Καπιτωλίνα)7의 주교였던 나르키소스(Νάρκισσος: 185-?, ?-231)와 카이사레이아(Καισάρεια)의 주교 테오필로스(Θεόφιλος)가 주교 회의를 진행하였는데 여기서는 빅토르 1세의 의견대로 로마 교회 방식으로 부활절을 기념해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반대로 에페소스(Έφεσος)의 주교 폴리크라테스(Πολυκράτης)는 가장 강력하게 로마 교회의 의견에 반대하였는데, 그는 에페소스에서 열린 주교 회의에서 니싼월 14일을 부활절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니 폴리크라테스와 같이 로마 교회에 반대하는 결론을 내는 주교 회의가 생각보다 많았다.
로마 교회의 수위권을 주장했던 빅토르 1세는 이와 같은 결과에 대해 매우 분노하였고,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주교들과 교회들을 파문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러한 완고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리옹(Lyon)의 주교였던 이레나이우스(Irenaeus)는 교회의 어른인 로마 교회가 축일과 같은 문제로 인해 분쟁을 만드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빅토르 1세가 소아시아 교회와의 상통을 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폴리크라테스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은 완고한 빅토르 1세의 태도에 강하게 반발하였고, 폴리크라테스는 로마 교회의 처사에 강한 유감을 피력하기 위해 서한을 보내기까지 했다. 로마 교회가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로마 교황의 수위권이 초기 기독교 세계에서는 그다지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빅토르 1세는 결국 파문을 백지화할 수밖에 없었고, 부활절 날짜에 대한 논쟁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채 각자가 옳은 대로 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활절 날짜 문제는 130여년 뒤인 325년, 니카이아(Νίκαια)에서 열린 제1차 세계공의회에서 해결된다. 니카이아 공의회는 로마 교회의 입장을 지지하였고, 결국 그 때부터 부활절은 춘분 이후의 첫 보름달 다음 일요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잘 지켜지던 부활절 날짜에 문제가 생겼다. 이것은 태양력인 율리우스력의 오차에서 비롯되었다. 율리우스력으로 개정 당시 1 태양년은 365.25년이었다. 그러나 현대 과학기술을 통해 정밀하게 따지면 1 태양년은 약 365.24219878일에 해당한다. 즉 율리우스력의 1 태양년은 실제와 0.0078일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인데 니카이아 공의회로부터 1200년이 지난 1525년에는 0.0078 x 1250 = 9.75 일의 오차가 누적되어 버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부활절의 날짜가 세대를 거치다보니 예전보다 상당히 앞당겨지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뭔가 문제가 있음을 느낀 학자들은 달력의 개정을 논하였지만,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유럽 문화권에서 교회가 정하는 것과 달리 임의로 역법을 바꾸었다가는 모든 의식과 축일 및 행사들이 엉망이 되어 사회 혼란이 야기될 수도 있었다. 동방 교회의 세계가 오스만 제국 영향 하에 있었고 당시 러시아 차르국은 유럽사회의 일원으로 인식되기 이전이었던 당시, 오직 서방 교회만이 단독으로 이 일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결국 트리엔트(Trient)에서 열린 공의회는 교황에게 개력(改曆)의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에 그레고리오 13세는 1582년, 수정된 역법을 공개하였다. 이 역법은 기존에 4년마다 윤일을 두던 것에 100으로 나눠 떨어지는 해에는 윤일을 두지 않았고, 다시 400으로 나눠 떨어지는 해에는 윤일을 두어 오차를 수정했다. 이렇게 개정된 역법에 따르면 1 태양년은 365.2425 일이었고, 오차가 획기적으로 감소하여 약 3,300년이 지나야 1일의 오차가 발생하는 수준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는 1582년 10월 4일 다음을 1582년 10월 15일로 선포하고 10일간을 아예 삭제시켜버렸다. 로마 가톨릭을 따르는 이탈리아 국가들과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등은 즉각 그레고리력을 받아들였다. 당시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반대하는 국가들은 바로 그레고리력을 채용하지는 않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레고리력을 하나둘 채택하게 되었다.
문제는 동방 교회였다. 동방 교회는 이렇게 중요한 달력에 관한 문제를 놓고 서방 교회가 세계공의회와 같은 전체 교회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역법을 개정했다고 주장하면서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 서방 교회는 역법의 개정이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방 교회도 무리 없이 수정된 달력을 받아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당시 세계총대주교 예레미아스 2세(Ιερεμίας Β΄: 1572-1579, 1580-1584, 1587-1595)는 그레고리력 채택을 거부한다고 그 뜻을 분명히 밝혔다.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체코 및 슬로바키아 교회를 제외한 동방 교회는 니카이아 공의회 때 결정된 사항을 그대로 따를 것을 주장하였고, 율리우스력을 계속 쓸 것을 고집하였다. 바로 1582년부터 동서교회의 축일은 모두 불일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일치는 세속 정권들이 감내하기에는 매우 힘든 것이었다. 서방 교회의 영향을 받은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이 열강으로 성장하여 전 세계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이들과 다른 율리우스력을 고집한다고 해서 득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미국과 같이 유럽에서 도래한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는 같은 지역내에 그레고리력을 쓰는 사람과 율리우스력을 쓰는 사람이 같이 사는 경우, 어떤 이들은 성탄절과 신년으로 축제 분위기를 한껏 내는 반면, 다른 이들은 성탄절 전 금식을 지키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사실 비단 미국의 문제 뿐 아니었다. 전세계 사람들의 상호 왕래가 잦아지고 지구촌적인 성격이 강해짐에 따라 서로 다른 달력을 사용함으로써 생겨나는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모든 것이 국제화되어가고 있는데, 이 세상에서 더 과학적이라고 여겨지며 심지어 동양에서까지 채택되기 시작한 그레고리력을 거부하는 것은 세속 세계로부터 교회 세계를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세르비아의 천문학자였던 밀루틴 밀란코비치(Милутин Миланковић)가 손을 본 개정 율리우스력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밀란코비치의 율리우스력은 4년마다 윤일을 두되 100으로 나눠 떨어지는 해 중, 900으로 나눠서 나머지가 200이나 600이 되는 해에만 윤일을 두고 나머지에는 윤일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1 태양년은 365.2422 일로 계산되었고, 이는 그레고리력보다 약간 더 정밀하여 약 3,600년이 지나야 1일의 오차가 발생하는 수준이었다. 이에 1923년, 세계총대주교 멜레티오스 4세(Μελέτιος Δ': 1921-1923)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범 정교회(Pan-orthodox) 회의를 개최할 것을 선언하였고 이 회의에서 달력 문제를 논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멜레티오스 4세는 동방 교회 성직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었다. 동방 교회 사람들 일부는 그가 프리메이슨(Freemasonry) 일원이라며 비난했고, 정교회의 수장으로는 걸맞지 않는 '모더니스트(modernist)'의 성격을 지닌 사람으로 사상이 매우 불순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결국 그가 소집한 회의에는 다른 총대주교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직 밀란코비치가 속한 세르비아 정교회의 총대주교 디미트리에(Димитрије: 1920-1930)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해외 러시아정교회의 대표였던 수도대주교 아나스타시(Анастасий)는 회의에 참석하긴 했으나 달력 개정에 관한 논의를 지켜보다가 이런 회의는 전혀 무의미하다며 개탄한 뒤 회의장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경우 결정을 내리기는 훨씬 손쉬웠다. 회의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멜레티오스 4세는 밀란코비치의 개정 율리우스력을 채택한다고 선언하였다. 당시는 니카이아 공의회가 있었던 325년으로부터 약 1600여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 사이에는 대략 12-13일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밀란코비치의 개정 율리우스력을 채택하려면 13일 정도를 아예 삭제시켜 그레고리력과 날짜를 일치시키는 작업도 같이 병행되어야 했다. 이에 1923년의 10월 1일부터 10월 13일까지가 삭제되어 1923년 10월 14일부터 그레고리력과 개정 율리우스력은 같은 날을 가리키게 되었다. 동서교회의 달력이 350년만에 처음으로 동기화된 셈이었다.
하지만 율리우스력의 개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리스 교회의 예를 살펴보자. 1924년에 그리스 교회는 자치 교회의 수장인 대주교 흐리소스토모스 1세(Χρυσόστομος Α΄) 주재 하에 주교 회의를 열어 개정 율리우스력을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교회에서도 역시 역법 개정에 대한 반발이 매우 극심했다. 특히 플로리나(Φλώρινα)의 수도대주교였던 예르마노스(Γερμανος)는 수도대주교직을 사임하면서까지 이 결정에 극렬히 반대하였고, 예전 율리우스력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수도사들을 규합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개정 율리우스력은 서양의 영향을 받은 역법으로, 신앙의 표준이 된다고 믿는 니카이아 공의회의 정신을 훼손시켰다고 주장했다.
사실 역법의 개정은 실질적인 교회 사목 활동에도 여러 가지 불편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었다. 당시 교회 절기와 축일은 태음태양력에 맞춰진 것과 율리우스력에 맞춰진 것 두 종류가 있었다. 태음태양력에 맞춰진 축일은 보통 부활절로부터 며칠 전, 몇 주 뒤 이런 식으로 정의된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동방 교회의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정결한 월요일(Καθαρά Δευτέρα)은 부활절로부터 48일 전이며, 정교 주일(Κυριακή της Ορθοδοξίας)은 사순절의 첫 주일이다. 예수 승천 축일은 부활절로부터 39일 지나서이다. 이런 절기와 축일들은 부활절의 속성상 매해 바뀔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율리우스력에 맞춰진 축일들은 태양력에 맞춰져있기 때문에 매해 고정적인 날짜였다. 예를 들어 성모 희보 축일은 3월 25일이었고,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와 달리 이 날을 고정적으로 지켜 기념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율리우스력을 개정해서 13일을 건너뛰어 버리면 기존 율리우스력에 맞춰서 지정했던 태양력 축일들이 부활절 기반 태음태양력 축일 및 절기들과 뒤섞여버리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축일을 겹쳐놓아 교회 행사를 지정한 것들에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동방 교회에서는 성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 축일인 6월 29일을 기념하기 위해 오순절 다음 주 월요일부터 이날까지 금식을 진행해왔다. 그런데 태음태양력으로 정해지는 오순절과는 달리 개정 율리우스력을 따르면 양력으로 13일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어떤 해에는 아예 이 금식 기간이 없어지는 때도 생겨날 것이었다.11 이러한 변화는 지극히 불편부당하고 비정상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율리우스력 개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사람들이 서방 사람들과 동일한 시기에 성탄절 및 신년 축제를 즐기기 위해 달력을 수정하려고 한다고 비난하기까지 하였다. 세속화와 서구화에 반발하며 교회력은 과학적인 것과는 별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 그들은 과거 달력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구력주의자(舊曆主義者, Old Calendarist)라고 불리었다. 이들 구력주의자들에게 힘을 불어넣는 놀라운 사건이 1925년에 벌어졌는데, 성 십자가 축일에 2천여명의 사람들이 하늘을 밝게 비추는 십자가의 환상을 목격한 것이었다. 그러나 구력주의자의 지속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방 교회 세계에서 개정 율리우스력을 채택하는 교회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폴리스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와 같은 총대주교좌가 있는 교회들은 물론이었고, 그리스와 키프로스도 이를 채택하였으며, 나중에는 루마니아, 폴란드, 불가리아, 대다수의 미국 교회들까지 이에 가세하였다. 물론 가장 영향력 있는 러시아 교회는 이에 반대하였으며 세르비아와 조지아, 예루살렘 교회, 그리고 아토스 산의 수도사들은 개정 율리우스력 채택을 반대했다.
그리스에 있는 구력주의자들은 상황이 자꾸 자신들의 의견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감지하고 이에 1935년에 분립(分立)을 선언하였다. 예르마노스를 필두로하여 구력주의자 성직자들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리스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달력을 개정함으로써 통일된 정교 신앙을 분리시켰고,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을 두 파로 갈랐다. 그들은 7개의 세계공의회와 동방 정교회에서 지켜져 온 유서 깊은 전통에서 인정된 교회의 전통을 위반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자 사도적인 교회의 교의를 건드리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그리스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그들의 독선적인 행태로 보건대 비정통적으로 깊은 사려 없이 그레고리력을 들여왔으니 정교 신앙에서 그들 스스로를 끊어냈음이며 이를 통해 7개의 세계공의회와 정교회 법과 전통, 그리고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 세르비아, 폴란드, 성산(聖山), 그리고 시나이 산의 교회들의 기초로 세워 진 정교회와의 관계에서 본질적인 분열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중략) … 아테네의 대주교가 자신의 서명을 통해 스스로가 분리주의자임을 선언하였으니, 우리로서는 그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분열을 조장한다는 것과, 달력 개정을 통해 정교 신앙을 가르고,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의 교권적, 민족적 영혼을 나눠버리려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는가?13
1935년 4월에 이들은 네 명의 주교를 서임함으로써 완전한 분리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구력주의자 교회는 1940년대에 들어서며 내부 논쟁에 휩싸이는데 플로리나의 수도대주교였던 흐리소스토모스가 국가 교회의 성사를 인정할지 말것인지에 대해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면서 생겨났다. 보다 완고한 보수주의자들은 세속적인 국가 교회의 성사는 은총이 없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들은 브레스테나(Βρέσθενα)의 수도대주교였던 맛테오스(Ματθαίος)를 중심으로 큰 파당을 형성했다. 결국 1948년 맛테오스가 단독으로 주교들을 서임함으로써 분열의 단초를 마련했다. 비록 맛테오스가 죽고 나서 흐리소스토모스가 국가 교회의 존재는 분리주의적이며 그들의 성사는 은총이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분열은 봉합되는 듯 했지만, 흐리소스토모스를 따르는 플로리나파(派)와 맛테오스를 따르는 맛테오스파가 엄연히 수면 밑에서 투쟁하고 있었다.
한편 흐리소스토모스는 스스로 주교를 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흐리소스토모스 사후 플로리나파에는 주교가 한명도 없었다. 흐리소스토모스는 유언으로 플로리나파 사람들이 맛테오스파 주교 산하로 들어갈 것을 촉구했지만 사람들은 괜한 역풍을 맞을까봐 두려워 자신들만의 교계를 따로 정립하게 된다. 여전히 율리우스력 사용을 고집하던 해외러시아정교회가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었으며 1960년에 대수도원장인 아카키오스(Ἀκάκιος)가 주교로 서임되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러다가 플로리나파 교회는 수장이었던 대주교 아픅센티오스(αυξεντιος)로 인해 심각한 내홍을 겪고 1985년에 그를 폐위시킨 뒤 이듬해 흐리소스토모스를 새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여기서 아픅센티오스를 따르는 성직자들이 반발하여 분립할 움직임을 보였으나 2006년에 최종적으로 화해하게 된다. 그러나 1995년에 흐리소스토모스의 의견에 반대하는 일단의 성직자단이 분열을 일으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는데 일부는 다시 플로리나파 교회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세계총대주교좌 산하의 미국 정교회로 돌아갔고, 소수는 분열된 상태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교회를 수립한다. 이 때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라미아(Λαμία)의 주교 칼리니코스(Καλλίνικος)였고, 이들은 2003년에 수장으로서 아테네의 주교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를 임명하였다.14
한편 맛테오스파는 완고한 보수주의적 성격 때문에 인기를 많이 잃었다. 이들은 1958년 아테네의 대주교로 아가탕겔로스(αγαθαγγελος)를 선출했고 1972년부터는 안드레아스(Ἀνδρέας)가 2005년까지 대주교로 재임하면서 맛테오스파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2005년부터는 수도대주교 키리코스(Κήρυκος)의 분리주의적 행동 때문에 교세가 많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구력주의자는 비단 그리스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리스 다음으로 가장 큰 구력주의자 세력은 바로 루마니아에 있었다. 1924년 루마니아 교회가 개정 율리우스력 채택을 승인하자 몰다비아(Moldavia) 지역의 일부 성직자들이 이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계통의 신자들은 루마니아 정교회가 부활절을 개정된 율리우스력에 따라 그레고리력과 같은 날짜에 지키자 크게 반발하였는데 이에 따라 루마니아의 구력주의자들의 세력도 점차 커졌다. 이에 루마니아 정교회 총대주교 미론(Miron: 1925-1939)는 구력주의자들을 박해하였고, 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루마니아의 구력주의자들이 재기할 수 이었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자국의 혼란상 덕분이었다. 세력을 온전히 규합하는데 성공한 그들은 1957년 루마니아 구력주의자 정교회의 수도대주교로 글리케리에(Glicherie)를 선출함으로써 독자적인 교회로 독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루마니아 구력주의자 정교회 역시 해외 러시아정교회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며 이들은 불가리아 구력주의자 정교회와 연결하여 비록 규모는 작지만 불가리아에도 구력주의자들이 분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위의 이야기를 보면 구력주의자가 소수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 2015년 현재 율리우스력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교회는 예루살렘, 러시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조지아, 우크라이나 교회, 그리고 2014년 6월 15일을 기점으로 하여 다시 율리우스력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하 폴란드 교회이며16 이로 인해 이들의 영향을 받은 교회의 성탄절은 12월 25일이 아니라 이보다 13일 늦은 1월 7일이다. 같은 정교회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들도 서로 다른 일자에 절기를 지키고 이를 기념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 시절인 2세기부터 현재 21세기까지 달력을 둘러싼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이것은 비단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이라는 역법의 차이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 아니며 서구화, 교회의 전통, 세속 교회와 서방 교회와의 관계, 국가의 상황 등과 복잡하게 얽히면서 생겨난 분쟁이었다. 유대력과 율리우스력,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 그리고 그레고리력과 개정 율리우스력 사이에서 벌어진 교회들의 신경전을 보노라면 이 세상 모든 시간을 '자연수'로 인식하는 것이 야속할 정도로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그들의 믿음이요 신조인 것을.
따라서 달력 분쟁의 역사를 돌이켜 살펴보면, 1930년에 엘리자베스 아켈리스(Elizabeth Achelis) 여사가 제안했던 세계력(世界曆, The World Calendar)이 어떤 운명에 처했을는지 굳이 인터넷을 뒤적이지 않고도 바로 짐작이 가능하다. 세계력은 지금까지 나온 그레고리력 대안 역법으로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력의 가장 기본이 되는 '1주=7일'의 공식과 안식일의 존립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유대교와 기독교인, 그리고 무슬림과 같은 아브라함 종교 신자들과 성직자들의 강력한 비판에 직면하였다. 결국 1956년에 국제 연합(United Nation)은 더 이상 세계력 채택을 논의하는 모임을 가지지 않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오랜 달력 분쟁은 새로운 선수가 링 위에 등장하는 것조차 막아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