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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회 대분열 22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22
동방 정교회의 종교 개혁 논의
No Reformation in Eastern Orthodox Churches
한편, 로마 가톨릭에 반기를 든 루터 교회의 신학자들은 당시 로마 가톨릭과 반목하고 있었던 동방 정교회와 접촉을 시도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적의 적은 친구'라는 계산 하에서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는 공동 전선을 펴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동방 교회가 처한 상황과 로마 가톨릭보다 훨씬 더 보수적으로 완고하게 전통을 지키는 정교회 특성상 그런 바람은 사실 무의미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실제로 많은 부분에서 동방 정교회는 로마 가톨릭과 흡사한 부분이 훨씬 많았다. 따라서 루터 교도들의 이러한 접근은 자신들의 개혁 교리가 다른 기독교 공동체, 특히 사도로부터 내려온 초대 교회 특성을 잘 가지고 있는 동방 교회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를 타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며, 물론 운좋게 진행된다면 반(反) 로마 연합을 형성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다른 분파와 신학적인 교류를 했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었다. 교회 일치까지는 아니더라도 교회 일치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단계인 신학 교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두 진영 사이의 대화는 독일의 튀빙겐(Tübingen) 대학교에서 활동했던 루터교 신학자인 야콥 안드레아(Jakob Andreae)와 그리스어에 능통했던 고전철학자 말틴 크라우스(Martin Kraus)가 먼저 열었다. 야콥 안드레아는 그리스인 디미트리오스(Δημήτριος)를 통해 당시 세계총대주교였던 예레미아스 2세(Ιερεμίας Β΄: 1572-1579, 1580-1584, 1587-1595)에게 루터교 신앙의 정수(精髓)인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Augsburger Konfession)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보냈다. 로마 교황에게는 온갖 욕설과 험한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었던 그들이지만 그와는 달리 세계총대주교에게는 무척 매우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
저희 신앙의 요체를 담은 작은 책을 드리니 총대주교 성하(聖下)께서는 받아보셔서 저희의 신앙이 어떤지, 그리고 성하의 교도권 하에 있는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 혹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불일치하는 부분이 있는지 살펴주십시오. 바라옵기는 이게 너무 큰 요구가 아니라면 성하께서 일전에 저희에게 보여주셨던 선의와 마찬가지로 이 책을 받아 봐 주시길 바라며,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다 비슷한 생각을 갖게 하신 것이라면 이 글에 대해 긍정적인 판단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총대주교에게 보내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스 성직자들 눈에는 루터 교도들의 신앙이 대단히 이단적이리고 여겨졌던 듯 하다. 처음에는 이들과의 대화에 굳이 휘말리지 말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동방 교회 입방에서는 모처럼 자신들을 극진히 예우한 서방 세력의 접근을 굳이 물리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세계총대주교 예레미아스는 당시 최고 수준의 여러 정교 신학자들의 도움과 자문을 받은 끝에 1576년 답신을 보낸다. 하지만 답신은 지극히 의례적인 수준이었고 로마 가톨릭 교황보다 유화적으로 쓰인 것일 뿐 내용 자체는 동일했다.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으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받아주겠다는 것이었다.
... 당신들의 말에 답하기로는 우리로부터 나와 할 말은 없고, 오직 당신들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일곱개의 거룩한 세계 공의회의 가르침에거 나오는 것들 뿐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교부들과 성서의 가르침을 좇아 우리의 의견을 말할 뿐이며… 성령께서 그 위에서 숨쉬며 그들을 통해 말씀하시니 주님의 말씀 위에 선 그들의 언사는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을 확립하신 우리 교부들께서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금하셨기에, 신앙을 수정하는 유일한 길은 거룩한 공의회를 좇아 사도들의 결정을 지키며 모든 것에서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세계총대주교로부터 온 편지에 루터교 신학자들이 낙담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그들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자세한 주석을 붙여 재차 예레미아스에게 보낸다. 하지만 1579년 튀빙겐의 신학자들에게 돌아온 세계총대주교의 답장은 그들을 더욱 절망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예레미아스는 두 번째 편지에서 보다 굳건한 정교 신앙의 정당성을 역설하면서 교회의 전통을 더 따를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 거룩한 제6차 세계공의회에 따르면 성서는 교부들의 해석에 따라 이해되어야 하며 궤변에 의해 과도하게 해석하려는 우리들이 해석하는 바를 따라서는 아니됩니다. 법령 19조의 결론을 읽어 보십시오: 만일 성서에 관한 이견이 생겼거든 교회의 박사들이 해설했던 것과는 달리 해석하려고 들지 말 것이다. 또한 성서에 대한 해석이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성서의 핵심으로부터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하지 말고 단지 영광스럽게 남아 있도록 할 것이다...
... 수많은 합리화로서가 아니고 신실한 마음으로 교회의 전통을 받아들입시다... 교부들의 전통으로부터 비난받은 새로운 신앙을 익히지 맙시다. 거룩한 사도가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2라고 했습니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보낸 첫 번째 및 두 번째 편지에서 언급된 성서에 대한 구절들을 면밀히 연구해보니 우리는 당신들이 당신들의 새로운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그것들을 잘못 해석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부탁하는 것이니 교부들이 해석해 온 바, 일곱 개의 세계 공의회 및 지역 주교 회의에서 추인한 해석들을 따라 성서를 해석하시길 바랍니다. 일전에 이미 말씀 드렸지만 교부들이 이미 설정하셨던 영원무궁한 테두리를 들어올리거나 삭제하는 것은 불필요하므로, 우리는 제6차 세계 공의회의 초반부에 언급된 명제를 어기지 않을 것이며 그러니 그에 따른 징벌을 받으려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혹여 위배된 것이 있다면, 당신들은 신중한 사람들이니까 지금부터라도 당장 고쳐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당신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칭찬받을 것이며 사람들에게서도 그리고 우리 정교회에게서도 칭찬받을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의 몫이지만, 그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은 여러분을 구원으로 이끄는 역사입니다. 이 말을 잘 생각해 주시길 바라며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루터교 신학자들은 보다 완고해 보였던 세계총대주교의 두 번째 답신에 더욱 실망했지만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이들은 더욱 유화적인 문체를 써서 루터교 신학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를 담아 편지를 보냈다. 특히 이 편지에서는 필리오케(filioque)와 의화(義化) 교리, 그리고 자유 의지와 성만찬에 관한 상세한 의견이 담겨 있었다. 이 편지는 1580년 6월에 콘스탄티누폴리스로 발송되었다. 그런데 당시 예레미아스는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1579년에 폐위당한 상태였다. 당시 오스만 제국 내에서 막대한 부를 통해 정치 권력에 영향을 주던 미하일 칸타쿠지노스(Μιχαήλ Καντακουζηνός)가 암살당하면서 그가 지지했던 예레마이스 역시 실각하게 된 것이다. 혼란의 시기를 지나 예레미아스는 이듬해인 1580년에야 세계총대주교좌를 되찾게 되었고 몇 달동안의 안정기를 취한 뒤에야 튀빙겐으로부터 온 편지에 답장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세 번째 답신은 최초의 정교회-루터교 사이의 신학 교류에 종언을 고하는 편지였다.
... 오 현명한 독일인들이여, 당신들이 보낸 책을 받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지난 편지들에 대해 우리가 보낸 답신에 대해 충분히 만족하지 못했던 이유와 근거들을 재차 상세히 적어주셨습니다. 당신들이 말하길 당신들의 사고는 성서 뿐 아니라 나중에 옳고 낫다고 여겨진 교부들의 가르침에서도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리고나서 당신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삼위일체론을 꺼내놓고는 성령이 성부 뿐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발출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옹호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표현만 다를 뿐 다른 그리스 교부들 역시 성령이 성자로부터 발출했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보고 있었는데 그 저작들은 아타나시오스(Ἀθανάσιος), 키릴로스(Κύριλλος), 에피파니오스(Ἐπιφάνιος), 바실레이오스(Βασίλειος), 나지안조스(Ναζιανζός)의 그레고리오스(Γρηγόριος)의 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 생각에는 당신들이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발출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성서와 교부들의 명백한 문구들을 제대로 이해하길 포기하고 이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거나 교부들도 그렇게 다른 방식으로 생각했을 거라고 여기는 것인데 결국 당신들의 목적에 맞게끔 이를 변개(變改)했다고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당신들에게 답변을 주지도 않았고 그저 조용히 있었던 것일 뿐입니다. 당신들은 성서와 성인들의 해석을 당신들 입맛대로 단순하게 바꿔버렸습니다. 파울로스(바울)는 우리에게 질책하기를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3고 하였습니다...
... 그러나 당신들은 심각하게 성서의 가르침을 당신들 목적대로 바꾸고 왜곡했음에도 몇 개의 성사(聖事)에만 만족할 뿐 다른 것들은 성사가 아닌 성서에서 명시하지 않는 교회 전통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 요안네스 크리소스토모스(Ἰωάννης ὁ Χρυσόστομος)가 받아들였던 견진의 성사마저도 반대하더군요... 그러고서도 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 참된 신학자들의 해석을 저버리고 당신의 것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성화상과 성물들에 대해 가증스럽다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역사와 전통을 통해 파악하건대 바로 헤브라이 사람(유대인)들로부터 온 것입니다. 루터교의 분열은 곧 경건을 가장하여 세계 각 곳으로 흩어진 유대인들로 인한 것입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들은 뿌리를 취한 채 악을 향해서는 열려 있어서 매일매일 갈수록 더 악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유대인들과 완전히 상통하지 않는 대신 교회의 성사들을 온전히 흔들리지 않고 지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전하는 거룩한 사도들의 계승자들로부터 나온 가르침을 가까이 따를 뿐입니다. 그들의 해석은 그 모든 금은보화보다 값집니다. 물론 모든 성인들이 우리의 구원자 혹은 구속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한 분만을 우리의 구원자요 구속자로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인이고 죄악 중에 거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향하여 거룩하고 만족스런 방식으로 삶의 여정을 마친 중보자로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여 주시는 성인들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좇는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짓는 것도 아닙니다. 성화상과 성물을 숭배하는 것은 신앙을 향해 달려나가는 자들에게 종종 수많은 치유를 불러일으키며, 우리에게 비범한 은혜를 선사하며, 또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밝히 깨우칩니다. 또한 성서 말씀에 따라서도 하나 더 고백하니 우리는 수도원의 삶을 존중합니다. 만일 진정 하늘 나라를 위해 온전히 예비하는 길을 선택했다면, 모든 세상 짐 버려둔 그들이 다시 그 뜻을 돌이키지 않기를 늘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는 다음과 같은 온유한 경고로 마무리되었다.
따라서 당신들이 우리를 더 슬프지 않게 했으면 좋겠으니 교부들을 이렇게 다른 방법으로 다룰 작정이어든 똑같은 주제에 대해서 다시 편지를 쓰지 말아주십시오. 당신들은 그들을 말로는 존경하고 높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의 무기가 된 거룩하고 신성한 교부들의 논의가 적절치 못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이에 저희는 이 글을 통해 당신들을 반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런 일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십시오. 당신들은 당신들의 길을 가시고, 교의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쓰지 마십시오. 만일 편지를 보내시려거든 오직 우의의 목적을 가지고만 쓰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결국 예레미아스의 세 번째 답장을 끝으로 루터 교회와 동방 정교회 사이의 대화는 단절되었다. 이후로 동방 교회 내에서 루터 신학, 더 나아가 종교 개혁 신앙을 논하는 것은 불경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실 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한 동방 교회에게 교회 개혁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교회 내부의 사람이든 외부의 사람이든 동방 교회의 모순을 발견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개혁하려 들었다가는, 안 그래도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분열과 치열한 교리 논쟁 때문에 자멸하게 될 것이 뻔하였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는 교회와 교리에 대한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태도가 강조되면 강조되었지 교회 개혁이 일어날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훗날 러시아의 총대주교 니콘(Никон: 1652-1658)이 일으킨 러시아 교회 개혁만 봐도 알 수 있다 (19편 참조). 러시아의 정세는 안정되고 나날이 힘이 커져가고 있었으며 교회의 권위 또한 어느 정도 커져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반발과 혼란을 무릅쓰고서라도 개혁 운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빈사 상태의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가 꿈꿀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서방 교회의 종교 개혁 운동 저변에 깔린 철학적, 신학적 사고는 동방 교회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편지에서 살펴봤듯이 오랜 기간의 분열, 그리고 급속도로 위축된 동서교회 간의 교류는 모든 것을 이질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또한 종교 개혁가들과 로마 가톨릭 교회가 충분한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신학적 내용, 혹은 서방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특성상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과 일치되는 몇몇 관점이 ㅡ 예를 들면 성령의 이중발출설 (8편 참조) ㅡ 동방 교회와의 대화를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다. 이미 동방 교회 사람들은 뿌리 깊게 서방 교회를 증오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사고와 전례를 '초대 교회에서 멀어진' 것들로 치부하며 비난하고 있었다. 그러니 거기서 더 멀어진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반가워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동방 교회에서는 '이젠 별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주장을 펼치는 서방 놈들이 나타났다'라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방으로 여겨졌던 잉글랜드, 네덜란드, 스웨덴과 같은 지역이 점차 국제적인 영향력을 키우게 되고, 이들 세계와의 교류가 이전보다 더욱 활발해지면서 동방 교회에서도 종교 개혁의 영향력이 비로소 점차 퍼지기 시작한다. 동방 교회에서 종교 개혁의 영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키릴로스 루카리스(Κύριλλος Λούκαρις)이다. 그는 키릴로스 1세(Κύριλλος Α': 1620-1623, 1623-1633, 1633-1634, 1634-1635, 1637-1638)로서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세계총대주교좌에 앉았고 키릴로스 3세(Κύριλλος Γ': 1601-1620)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좌에 앉아있었던 동방 정교회 사상 논란의 정점에 서있는 문제의 인물이었다. 벌써 세계총대주교로서의 임직 기간을 살펴 보면 알수 있겠지만 대단한 혼란기를 거치며 등극과 폐위를 여러 번 반복한 비운의 신학자이자 교회 지도자였다.
키릴로스는 크리티(Κρήτη) 섬 출신으로 당시 섬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통치 하에 있었다. 때문에 그는 위치상으로는 동방 지역에 살았음에도 자연스럽게 서방 세계의 학문의 영향력 하에 있었으며 실제로 베네치아에 있는 파두아(Padua)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쥬네브(Genève)와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 유학을 하게 되면서 장 칼뱅(Jean Calvin)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그는 사촌지간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멜레티오스 1세(Μελέτιος Α': 1590-1601)의 뜻에 따라 폴란드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폴란트-리투아니아 연방에 속한 교회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로 귀의할 것을 천명한 브레스트(Брэст) 협약을 반대하기 위한 정교회 측 특사로 활동하게 된다 (23편 참조). 그는 그 이후에도 현재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니우스(Vilnius)에서 정교회 신학교 교사로 활동하였고, 당시 세계총대주교 예레미아스 2세의 호의에 따라 정교회 영향력이 남아 있던 동유럽 지역을 순회하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종 운동을 저지하는 데 앞장 섰다. 멜레티오스 1세가 사망하게 되면서 알렉산드리아아의 총대주교로 선출되어 이집트로 돌아오게 되었고, 20여년 뒤에는 1620년에는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로 선출되어 거처를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옮겨 동방 정교회의 정신적인 수장이 되었다.
당시 동방 정교회의 가장 큰 화두는 동유럽 지역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격적인 선교 운동을 어떻게 하면 잠재울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 서방 세계에서 유학하면서 많은 인연을 쌓아 온 키릴로스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막 독립한 잉글랜드 교회와 연계를 시도하였고, 오스만 제국에 와 있던 네덜란드 대사 코르넬리스 하하(Cornelis Haga)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구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키릴로스의 신학은 점차 프로테스탄트 성향을 띠기 시작했고, 네덜란드에서 보낸 종교 개혁 신학자들의 저서를 받아보게 되면서 이러한 경향을 더욱 두드러졌다. 그는 훗날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가 되는 미트로파니스(Μητροφάνης: 1636-1639)를 네덜란드로 파송했고, 다른 수도사들도 신학 공부를 위해 잉글랜드와 스위스 등지로 유학을 보냈다. 미트로파니스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자면, 그는 헬름슈테트(Helmstedt)에서 공부하면서 1625년에 21장으로 구성된 정교회 신학과 관련된 글을 저술하는데, 여기서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루터교 신학을 포용하였고, 이들 루터교 신학자들의 연구를 귀중히 여기는 태도를 보였다. 특히 그는 여기서 외경을 정경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하였고, 연옥의 교리를 부정하였으며 성사의 경우 세례와 성찬, 고해는 성사로 인정하되 나머지 성사들(견진, 신품, 혼배, 종부)은 성사적 예식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각고의 노력을 펼친 결과 키릴로스는 서유럽의 수많은 종교 개혁가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특히 칼뱅의 예정설과 대립하던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5의 대표적인 신학자 요하네스 브텐보하르트(Johannes Wtenbogaert)과 서신을 주고 받았고, 여기서 그는 그리스 교회의 전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외교관 토머스 로(Thomas Roe)와도 매우 가깝게 지냈는데 토머스는 세계총대주교의 종교가 순수한 칼뱅주의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키릴로스는 잉글랜드 교회와의 친교와 교류를 목적으로 당시 동방 정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성경의 그리스어 필사본을 토머스를 통해 잉글랜드의 왕 제임스 1세(James I)에게 보냈는데, 이는 원래 알렉산드리아에서 보관되어 있던 것을 키릴로스가 세계총대주교가 되면서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이관해 왔던 것이었다. 당시까지도, 그리고 현재까지도 그리스어로 된 구약 및 신약 성경 완전 필사본은 흔하지 않은 진귀한 보물이었기 때문에 당시 이 문서를 연구했던 리차드 벤틀리(Richard Bentley)는 이 필사본을 가리켜 '세상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자 최상급의 필사본'이라고 극찬하였다.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인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에게는 아랍어로 쓰여진 진귀한 모세 오경 사본을 선물하였다.
프로테스탄트를 편애하는 동방 교회의 세계총대주교의 등장은 전 유럽을 술렁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당시 로마 가톨릭을 절대적으로 따르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들 궁정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예수회 및 가톨릭 성직자단은 키릴로스를 눈엣가시로 여겼으며 심지어 프랑스 왕 루이 13세(Louis XIII)는 오스만 제국에 가 있는 대사에게 편지를 써서 위그노(Huguenot)이자 이단적인 사상으로 오염된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를 폐위시키도록 힘쓰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반대로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있던 잉글랜드, 네덜란드, 독일 및 스웨덴 정부는 키릴로스를 옹호하였으며 오스만 궁정은 이들 대사들의 외교력 싸움터가 되었다. 이러한 정치외교적 역학관계가 움직일 때마다 키릴로스는 폐위와 등극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키릴로스는 그나마 안정적이었던 두 번째 임기(1623-1633)에 역사적인 일을 단행하는데 수도사 막시모스 칼리폴리티스(Μάξιμος Καλλιπολίτης)를 통해 당시에 쓰이던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경을 스위스의 쥬네브에서 출판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를 파멸로 몰고 갈 문서 하나가 1629년 쥬네브에서 출판되는데 바로 라틴어로 번역되어 나온 '신앙 고백서(Confessio)'였다. 1633년까지 이 책은 라틴어 뿐 아니라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 및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는데 모두 세계총대주교 키릴로스가 저술한 책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 책에서 키릴로스는 칼뱅주의 신학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당시 정교회 성직자들과 신도들은 물론이거니와 전 유럽의 신학자들과 지식인은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혹자는 이 책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책이며, 이런 글을 절대로 세계총대주교가 썼을 리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 책의 진짜 저자가 키릴로스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했고, 키릴로스 본인 역시 몇 차례 자신의 저작임을 의심하게 만드는 언사를 표하긴 했으나 결정적으로 이에 대해 반박한다든지 조작임을 선언한다든지 하는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책의 저자가 키릴로스라는 전제 하에) 그는 이 책에서 칼뱅주의의 요체를 모두 받아들인 자신의 신학을 여과 없이 드러내었다. 그의 신앙 고백에서 기존 정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고백을 하는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교회는 발칵 뒤집혔다. 신학적인 관점이 아무리 다양하기로서니 교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는 동방 교회의 입장에서 비교적 과격한 종교 개혁가에 속하는 칼뱅의 신학을 따르는 세계총대주교의 신앙 고백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젠 오스만 제국 궁정에서 외교관들만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고 대다수의 정교회 신학자들까지 여기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이런 복잡하고 험악한 상황 속에서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었던 무라트 4세(مراد رابع)의 강압적인 통치기간에 키릴로스는 몇 번이고 폐위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에 같은 이름을 가지는 세계총대주교 키릴로스 2세(Κύριλλος Β': 1633, 1635-1636, 1638-1639)도 폐위와 등극을 반복하게 되는데 그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예수회가 세운 신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었다. 이는 키릴로스를 둘러싼 논쟁 막후에 예수회의 강한 입김이 작용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힘겨운 정치외교 싸움에서 키릴로스 1세는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만다. 무라트 4세는 혼란스러웠던 재위 초기 시절 현재의 아제르바이잔, 이라크, 쿠르디스탄 지역을 페르시아의 황제였던 아바스 1세(شاه عَباس بُزُرگ)에게 내주었는데 이를 되찾으려고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그런데 군대를 일으켜 동쪽으로 진출하면 군사력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이 틈을 노린 유럽 및 러시아 세력을 견제해야 할 가능성이 있었다. 때문에 마음 놓고 페르시아로 쳐들어가기 위해서는 외교 및 군사적 노력을 통해 사전에 배후를 안전하고 든든히 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 키릴로스의 정적들은 세계총대주교가 카자크족(Казаки)과 연합하여 제국의 뒤통수를 치려 한다고 모함하였다. 자신을 지지해 줄 세력을 거의 잃었던 키릴로스는 결국 술탄의 명에 따라 폐위되어 유배되었는데, 배를 타고 가던 도중 보스포로스 해협에서 교살(絞殺)당한다. 결국 키릴로스의 종교 개혁 노력은 실패로 돌아간다.
비록 결말은 비극적이었지만 키릴로스 세계총대주교가 정교회 신학계에 찍어 둔 프로테스탄트로서의 발자국이 너무 선명했기 때문에 그가 축출된 이후 정교회 지도자들은 그가 남긴 칼뱅주의 신학적 자취를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나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는 예수회의 지원을 받은 키릴로스 2세가 재빨리 주교 회의를 소집하여 키릴로스 1세를 정죄하는 데 앞장섰다. 이 회의에서 키릴로스 1세는 교활한 성상파괴론자라는 오명을 받아 단죄받았다. 그러나 키릴로스 2세는 총대주교좌에 있을 만한 그릇은 아니었는지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고소를 많이 받았으며 결국 1639년에 술탄 무라트 4세에게 폐위되어 처형당한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은 파르테니오스 1세(Παρθένιος Α': 1639-1644)였는데, 그는 정교회 안에 망령처럼 떠돌던 키릴로스 1세의 칼뱅주의 신학을 씻어내는 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당시 몰도바(Moldova) 공국의 공작이었던 바실레 루푸(Vasile Lupu)는 당시 동유럽에 침투하던 로마 가톨릭 및 종교 개혁 세력의 신학으로부터 정교 신앙을 보호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공의회를 건의했다. 이에 파르테니오스 1세는 그리스와 러시아 정교 신학자들을 몰도바 공국의 야쉬(Iaşi)8에 모아 짧은 회의를 진행하였는데 이 때 이들 신학자들이 공의회 결정문을 내기 위해 참고했던 것이 바로 당시 키이우(Київ)의 수도대주교였던 페트로 모길라(Петро Могила)가 작성한 요리문답 '엑스포지티오 피데이(Expositio fidei)'이었다. 이 글은 당시 우크라이나 지역의 정교회 신도들을 위해 작성된 것으로 그리스 신학자들에 의해 수정된 뒤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반포되었다. 이 책에서는 당시 동유럽에 영향을 끼치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 및 프로테스탄티 교회의 교리들을 모두 반박하고 전통적인 동방 정교회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다
야쉬 공의회에서 최종 승인된 요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 및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야쉬 공의회에서 승인한 페트로가 쓴 이 방대한 요리문답은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중심으로 그리스 전통을 따르는 정교회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슬라브 전통을 따르는 정교회의 공동 신앙 고백서가 되었다. 동방 정교회의 입장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교회의 전통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고자하는 입장이었고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의 주장을 배척함으로써 교리 개혁보다는 교리 수호에 방점을 찍었다. 하지만 법령이 아닌 요리 문답이었기 때문에 단죄나 저주의 문장은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종교 개혁에 분명한 어조로 반대하는 동방 정교회의 입장은 1672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주교 회의에서 최종 확인된다. 당시 예루살렘 총대주교 도시테오스 2세(Δοσίθεος Β΄: 1669-1707)는 베들레헴에 예수 탄생 기념 교회를 축성하는 예식을 거행했는데 이 자리에 러시아를 포함한 동방 교회 고위 성직자들을 대거 초청하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키릴로스 1세로부터 촉발된 동방 교회 내 종교 개혁 관련 논의를 모두 정리하고자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회의의 결과 루터 교도들에게 보낸 세계총대주교 예레미아스 2세의 글과 야쉬 공의회의 결정문, 페트로 모길리아의 신앙 고백서는 정교 신앙의 바른 표현으로서 승인되었다. 그러나 키릴로스 1세의 저작은 이단성이 짙은 것으로 판결내렸고, 결국 키릴로스에게는 한 번도 모자라다고 하여 세 번의 저주문이 내려졌다.
예루살렘 회의의 결과물은 총 6장으로 구성된 책으로 편집되었는데 마지막 6장에는 18개의 신조로 구성된 도시테오스의 신앙 고백, 그리고 4가지의 질문과 답변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문서들은 사목 편지의 형태로 동방 교회의 주교들 사이에서 회람되었고 최종적으로는 러시아 교회에까지 전해졌다. 도시테오스의 신앙고백에서 쟁점이 되었던 부분만 간단히 발췌해오면 다음과 같다.
이로써 동방 교회에서 진행되었던 약 반세기동안의 종교 개혁 논의는 최종적으로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정교회의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에는 교부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전통에서 멀어진다면 비록 자신들과 대적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적일지라도 연합할 수 없다는 아주 보수적인 신앙을 견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현재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현재까지 정교회 신앙은 큰 변혁이나 개정이 없는 채로 보존되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