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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회 대분열 23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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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야기의 무대는 앞에서 열거했던 종교 개혁 논의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동유럽으로 옮겨 간다. 특히 여기서 주목하여 살펴보는 지역은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방을 통칭하는 루테니아(Ruthenia)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지역의 역사가 교회사에서 가장 처음 굵직하게 등장하는 때는 바로 키예프 공국의 대공 블라디미르 1세(Владимир I)가 콘스탄티누폴리스로부터 세례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988년이었다. 블라디미르 대공 이후 키예프 공국은 세를 자랑하며 강역을 넓혀갔지만 점차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많은 공국으로 쪼개졌고, 이렇게 분열된 상태에서 동쪽으로부터 바투(Бат)가 이끄는 몽골 군대의 침략을 받게 되면서 도시들이 모조리 황폐화되고 분쇄되고 만다. 소위 '타타르의 멍에'라고 불리는 고난의 시기에 이 지역은 농업 사회로 전락해버렸고, 사회 발전은 정체되는 참혹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다가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역전되고 모스크바 공국을 맹주로 한 러시아 지역의 공국들이 킵차크 칸국(Улус Джучи)의 몽골 군대를 격파하기 시작한다. 프로이센 동부 발틱해 연안에 자리잡고 있던 리투아니아 공국 역시 끈질기게 몽골 군대에 저항하면서 남하하였고, 칸국 내부의 정치 상황을 이용하여 크림 반도 북부까지 진출하는 위용을 과시했다. 한편 이 시기에 리투아니아 공국의 서쪽에 자리잡았던 폴란드 왕국은 몽골 군대와 오스만 제국군의 영향 속에서도 차츰 영토를 넓혀 갈리치아(Galicia)의 중심 도시인 리비우(Львів)를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 이 시기에 리투아니아 공국과 폴란드 왕국은 공공의 적을 대항하게 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되었고, 특히 발트 해 연안에 자리잡아 자신들을 공격하던 튜턴 기사단(Teutonic Orders)에 대항하기 위해 손을 맞잡게 된다. 두 나라의 동맹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리투아니아 대공이었던 요가일라(Jogaila)는 폴란드 귀족들의 조건을 수용하면서 1386년에 폴란드의 어린 여왕인 야드비가(Jadwiga)와 결혼하는 동맹을 성사시켰고 이를 통해 폴란드 왕의 칭호를 겸한 최초의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었다. 이러한 형태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양국의 귀족들은 두터운 인맥을 다져놓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로도 리투아니아 대공과 폴란드 왕의 칭호를 겸한 사람들이 더 있을 정도였다. 사실상 두 나라는 상류층 사회에서 느슨하게 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느슨한 연합이 평화롭게 계속 지속될 수는 없었다. 급속도로 팽창하는 모스크바 공국의 위협이 엄습한 것이다. 직접 국경을 맞댄 상태에서 모스크바 공국의 무서운 군주 이반 4세(Иван IV)의 적극적인 팽창 전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던 리투아니아 공국은 보다 폴란드 왕국에 좀 더 의지하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폴란드의 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이었던 지그문트 2세(Zygmunt II)는 후계가 없는 상황이었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그가 죽게 되면 폴란드 왕국과의 관계는 자연히 멀어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중에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폴란드로부터 손쉽게 도움을 얻지 못하게 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이와는 별개로 지그문트 2세는 그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대로 죽게 되면 다시 폴란드 왕국은 자신들의 왕을, 리투아니아는 자신들의 대공을 따로 뽑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자기가 그토록 갈망했던 강력한 중앙 집권적인 군주제가 존치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대내외 사정들을 해결하기 위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구적이고도 완전한 합방이 추진된다. 사실 폴란드 왕국으로서는 그다지 병합의 필요성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만일 리투아니아 공국을 흡수 통합하는 형식으로 병합하게 된다면 왕국의 규모가 커지는 것이니 이 또한 굳이 사양할 필요성 역시 느끼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드디어 지그문트 2세는 1569년에 루블린(Lublin)에서 의회를 개최하여 이를 논의하게 하였다. 하지만 왕의 뜻과는 달리 상당한 진통이 이어졌고, 연합에 반대하는 빌니우스(Vilnius)의 대귀족 미칼로유스 라드빌라(Mikalojus Radvila)의 영도 하에 리투아니아의 유력 귀족 가문들이 회의장을 박차고 떠나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2 이에 발끈한 폴란드 왕국은 포들라지에(Podlasie), 볼린(Волинь), 키이우(Київ)의 귀족령을 병합할 것을 선언하였고, 이는 리투아니아 공국 영토의 1/3에 해당하는 거대한 지역이었다. 생각지 못한 군사외교적 행동에 엄청난 타격을 받은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은 요나스 호드케비치우스(Jonas Chodkevičius)를 일단으로 하는 귀족단을 다시 루블린으로 보내 논의를 지속하게 한다.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폴란드에 의한 흡수 병합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동군연합을 바탕으로 한 연방제 통일을 적극 호소하였으며 대타협은 그해 6월 28일에 이뤄졌다. 이로서 폴란드 왕과 리투아니아 대공을 겸하는 군주를 받드는 연합국이 되었다.
종교적인 문제는 바로 이 연합에서 시작되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이 상황을 바라보기 위해 앞서 열거한 정치적인 역사적 상황들을 다시 짚어본다. 폴란드 왕국은 미에슈코 1세(Mieszko I) 치세 때 기독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966년의 일이었다. 미에슈코 1세의 개종에는 그의 부인이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아마도 폴란드의 왕은 국교를 기독교로 확정함으로써 백성들 사이에서의 일체감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정부의 권위와 권력을 높임과 동시에 로마 교황청 및 이웃 가톨릭 국가들의 원조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교황 요한 8세(Ioannes XIII: 965-972)는 요르단(Jordan)을 폴란드의 주교로 임명하여 파견하였으며 이 때부터 폴란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이에 반해 리투아니아는 14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다신교 국가였다. 분명 근접해 있던 키예프 공국의 영향으로 인해 일부 유력 세력들은 기독교를 접했으나 민족 차원에서의 개종 혹은 국교 지정 노력은 전무했다. 더구나 지리상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영향권 사이에 위치했던 리투아니아로서는 양자택일을 하는 것보다는 둘 사이에서 적절한 양다리 정책을 펼치며 균형을 꾀하는 것이 더 유리했다.
하지만 양다리 정책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장 큰 위협은 앞서 언급한 튜턴 기사단이었다. 튜턴 기사단은 원래 십자군 전쟁 때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봉직하던 기사단으로 주요 거점 항구도시였던 아크레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실패 이후 유럽으로 귀환하여 각국의 이해관계에 맞춰 군사활동을 개시했고, 특히 프로이센을 점령한 이후에는 완전히 이 지역을 요새화하고 세력권을 구축하였다. 튜턴 기사단은 리보니아 기사단까지 흡수함으로써 세력을 발트해 연안을 중심으로 더욱 넓혔고 이 지역의 해상 무역까지 독점함으로써 경제적인 풍요까지 누리게 되었다. 더구나 이들은 공공연히 로마 가톨릭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지역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였다. 특히 동방 정교회 세력을 로마 가톨릭 교회에 반하는 이단적인 집단이라고 규정하여 러시아 정교를 신봉하는 주변국들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여기서 이교도 국가인 리투아니아도 그들의 칼끝을 피해갈 수 없었다. 리투아니아 공국은 끊임없이 기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또 이들로 인해 발트해 연안으로 진출이 가로막혀 있었으므로 기사단의 존재는 해상 진출 및 무역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위협은 동방 정교회를 신봉하는, 역시 앞서 소개한 모스크바 대공국의 팽창이었다. 노브고로드(Новгород)와 트베리(Тверь)를 병합한 모스크바 공국은 금방이라도 리투아니아로 밀고 들어올 태세였다. 리보니아가 삽시간에 모스크바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고, 이제 리투아니아의 대공은 무슨 수를 써야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리투아니아의 대공 요가일라가 폴란드의 왕녀 야드비가와 결혼하였다. 이때 폴란드 귀족들은 요가일라가 기독교로 개종해야만 결혼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종교가 큰 문제가 아니었던 요가일라는 이 조건을 수락하였고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니 이것이 1386년의 일이었다. 유럽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이교도 국가 리투아니아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요가일라는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임으로써 튜턴 기사단의 침공 명분을 없애버렸고, 폴란드 왕국과의 일치를 통해 세를 불렸을 뿐 아니라, 미래의 적인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대결을 위한 준비도 마치는 일석삼조(一石三鳥)의 효과를 누렸다. 그 덕에 1410년에 폴란드 왕국군과 리투아니아 공국군 연맹은 튜턴 기사단을 깡그리 무너뜨리는 대승리를 거두었으며, 북유럽의 강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200여년 뒤에는 모스크바까지 점령하여 차르를 바르샤바로 소환하여 굴욕을 줄 정도로 강성해졌다.
그러나 이것이 로마 가톨릭 개종에 따라 리투아니아에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은혜라고 여기기엔 리투아니아의 기독교 복음화는 느려도 너무 느렸다. 특히 지방에는 여전히 전통적인 다신교 숭배가 남아 있었으며 이는 이후 2세기 정도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미 민중들 사이에서 러시아 정교회가 퍼져 있었으며 다수는 아니더라도 꽤 많은 동방 전례 교회들이 사목하고 있었다. 수도 빌니우스에 가톨릭 성당이 세워졌고 주교구가 설정되었지만 공동 묘지 역할 정도로 여겨질 뿐 다른 유럽 도시들과는 달리 사람들의 생활상에 깊숙히 파고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어정쩡한 상황은 1569년 루블린 조약에 의해 삽시간에 뒤바뀌게 된다. 새롭게 태어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겉으로 볼 때에는 동군연합(同君聯合)이었지만 사실상은 폴란드의 리투아니아 합병(合倂)과도 같았다. 리투아니아 공국 전역에서 폴란드화가 진행되었고, 서유럽 문화를 훨씬 일찍 받아들였던 폴란드를 통해 리투아니아에 서방 세계의 문화가 전달되었다.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은 모국어를 점차 잊어갈 정도였고, 이후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에는 수많은 폴란드인들이 와서 살게 되었다.
리투아니아에 서유럽화가 진행되면서 루테니아 지역에서 사목활동을 벌이던 동방 교회 성직자들은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당시 루테니아의 성직자들은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와 상통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의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는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붕괴되어가기 일보직전이었다. 거세게 밀어닥치는 서구화에 대항할 만한 힘도 없는 판에 다른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도 없었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더 큰 문제는 미래의 지역 교회들을 이끌어나갈 성직자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제대로 된 정교회 신학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수준 미달의 성직자들이 빈사 상태의 교회를 이끌게 되었으니 자연히 교회는 도태되었다. 이에 반해 로마 가톨릭 교회는 1579년에 일찌감치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신학원을 세워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신학원의 라틴어 이름 'Alma Academia et Universitas Vilnensis Societatis Iesu'에서 알 수 있듯 이 신학원은 예수회(Jesuit)에 의해 세워졌다. 따라서 여기서 배출된 학생들은 친서방적이었으며 또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았다. 자연히 루테니아 지방에서 사목하던 동방 교회 고위 성직자들이 점차 이곳에서 수학한 신학자들로 채워졌다.
결국 이들은 궤멸되는 루테니아 지역의 교회를 살리고 안정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개혁을 단행한다. 그것은 바로 동방 교회와의 상통을 끊고 서방 교회와 상통하여 그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자는 것이었다. 당시 빌니우스 신학원 출신이자 키이우의 수도대주교였던 미하일라 라호자(Михайло Рогоза)는 1590년에 지역의 주교들과 회합을 가지고 로마 가톨릭 교회로 귀의(歸依)할 것을 논한다. 여기서 미하일라 라호자는 로마 교회와 상통하기 위한 조건으로써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전제조건을 내건다.
이는 동방 교회에서 지역 자치교회가 누리는 특권과 일치하며 이미 피렌체 공의회(17편 참조)에서 논의된 동서교회 통합의 가장 중요한 원리이자 전제조건이었다. 몇몇 주교들을 제외하고는 이와 같은 전제조건을 바탕으로 한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통합에 찬성했으며 이때 쓰인 문서는 즉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정부에 제출되었다. 당시 왕이었던 지그문트 3세(Zygmunt III)는 이를 환영하면서 교황과의 만남을 주선함과 동시에 관련 협약이 잘 성사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1592년에 통합에 찬성하는 주교들은 다시 모여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 1592-1605)와 지그문트 3세에게 통합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하였고, 사절단을 꾸려 로마로 향했다. 클레멘스 8세가 이들을 대환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마 교회와 루테니아 교회와의 통합 논의는 진지하게 진행되었고, 마침내 루테니아 교회의 주교들이 작성한 33개조의 연합 조약이 로마 교황청의 재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596년 10월, 브레스트(Брест)에서 루테니아 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장엄하게 공포되었다. 이 연합의 조약문은 동서교회의 연합이 어떤 방식으로 추구되었는가를 확인해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비록 '받아 주는' 서방 교회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다소 편협할 수는 있으나 적어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연합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33개조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는데 연합과 관련된 주요한 내용을 간추려서 정리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33조 말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 우리들은 가장 거룩한 아버지이신 교황과 우리의 자비로운 주인이신 왕의 은혜에 힘입어 우리가 써 드리는 이 모든 조항들을 확인해 주시고 보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믿음과 성사, 전례로 보증된바 우리의 양심에 거스름 없이 로마 교회와의 거룩한 일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또한 우리들에게로 그리스도의 무리들이 모인 것 같이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자들도 하루 속히 이 거룩한 연합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게 해 주십시오.
이와 같이 동방 교회의 관습적인 전례를 유지하면서도 로마 가톨릭 교회와 상통하여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지역 교회들은 연합 교회라는 의미로 우니야(унія)라고 불리었다. 이것이 영어의 uniate의 어원이 되었으며 우리말로는 동방 가톨릭 교회라고 부른다. 이 말 자체가 상당히 모순적으로 들리기는 한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가 마치 서방과 동방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인상을 심겨주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가톨릭이라는 말이 '공번된, 보편된' 교회라는 뜻을 나타낸다고 했을 때 근본적으로는 동방의 가톨릭 교회는 동방 정교회가 되는 것이 맞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방 가톨릭 교회는 동방 지역 ㅡ 특히 동방 정교회의 총대주교좌에서 관할하던 지역 ㅡ 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상통하는 교회들만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의 표현이 되고 말았다. 이 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형태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연합은 피렌체 공의회를 통해 그 근거기 마련된 바 있으며, 루테니아 지역의 교회들을 시작으로 하여 과거 동방 교회 관할에 있었던 지역들의 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고 그의 권위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하나씩 늘었다. 현재까지 총 22개의 동방 가톨릭 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 상통하여 한 지체를 이루고 있으며 각 지역의 전례 형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이 중 최대 신도수를 자랑하는 곳이 바로 브레스트 연합을 통해 가장 최초로 동방 가톨릭 교회를 형성하였던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로 전체 동방 가톨릭 교회 신도수 중 30% 정도를 차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체를 형성하는 동방 가톨릭 교회 각자는 자신들만의 수장을 가지며 그 수장은 자치 교회 내에서 선출되며 자신들의 관할 교구에 대한 재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상 각 지역의 교구장 주교들은 오직 교황만이 임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치 교회에서 수장이 선출되면 교황이 그를 받아들여 형식적으로 임명해 주는 절차가 추가되었다. 자치 교회의 수장은 각 동방 가톨릭 교회마다 호칭이 다양하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의 수장은 상급대주교(Major Archibishop)로 불리지만 마론파 교회의 수장은 총대주교이다. 에티오피아 가톨릭 교회의 수장은 수도대주교이고, 헝가리 그리스 가톨릭 교회의 수장은 총대주교대리(Exarch)이다.
동방 정교회는 크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자기 관할이었던 교구가 자기와의 상통을 끊고 적대시하는 서방 교회와 상통한다는 것은 분명 치욕적인 것이었다. 비록 동방 교회의 관습은 모두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교황의 수위권을 받아들이고 라틴 교회의 전통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온한 자세로 간주되었다. 당장 루테니아 지역에 대한 재치권이 있었던 콘스탄티누폴리스 세계총대주교좌는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그러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을 어쩌랴.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 뿐 아니라 동방 정교회 대부분이 실질적인 행동을 취하기엔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킨 것이 바로 모스크바 차르국의 등장이었다. 모스크바에 총대주교좌 신설되면서 러시아 교회는 동방 교회 중에서 가장 실제적인 권위를 가진 교회로 급부상하였고, 그 덕에 동방 정교회는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를 자처하는 힘있는 세속적 세력과 종교적 세력을 형제로 두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15세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소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기운을 차린 동방 교회는 동방 가톨릭 교회의 등장에 대한 반격을 취하게 된다. 그것은 교회의 재치권과 교구 및 주교의 권한에 관련된 교회법적인 측면, 그리고 군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첫번째부터 살펴보자.
러시아가 동란 시기(Смутное Время)라고 불리는 대혼란의 시기를 접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을 때, 모스크바 총대주교로 차르의 아버지인 필라레트(Филапет: 1619-1633)가 선출되었다. 동방 교회의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그의 착좌식에 참석하여 그를 축복하였는데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던 테오파니스 3세(Θεοφάνης Γ': 1608-1644)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테오파니스 3세는 모스크바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루테니아 지역을 방문했고 1620년 8월 어느 날, 여기서 아주 중요한 행동을 취한다. 바로 수도사였던 이오프 보레츠키(Иов Борецкий)를 키이우의 수도대주교로 삼아 서품예식을 거행한 것이었다. 이것이 동방 교회 성직자들의 공통된 뜻인지 테오파니스 개인의 돌발적인 행동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자신의 관할이 아닌 곳에서 이런 일을 행했다는 것은 사실 총대주교 사이에서 큰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였던 만큼, 나마도 세계총대주교의 암묵적 동의 하에 동방 교회 전체가 열망했던 바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당시 브레스트 연합을 통해 서방 교회와 화목한 이 지역 교회의 수장, 곧 서방 교회에서 인정하는 키이우의 수도대주교는 루테니아 지역 태생으로 예수회의 교육을 받았던 수도사 루츠키(Рутський)였다. 이로써 키이우 수도대주교는 둘이 되었다. 역사상 같은 교구좌를 두고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가 서로 다른 주교를 임명한 적이 없었다. 비록 두 교회가 발칸 지역과 모라비아 지역 등지에서 선교활동 경합을 벌이긴 했지만, 적어도 교구는 동일했고 그 교구좌에 앉는 주교가 서방 가톨릭 교회 사람이냐 동방 정교회 사람이냐가 문제였을 뿐이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동방 교회에서는 브레스트 연합 조약을 통해 서방 교회의 품으로 돌아간 루테니아의 교회를 불법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를 바로 잡아야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서방 교회 입장에서 보면 똑같이 불법적인 행동이었다. 뻔히 기독교 교구가 자리잡아 있는 지역에 동일한 구역을 관할 지역으로 설정한 교구를 또 설치하는 것은 주교의 관할에 대한 동서 교회의 일반적인 법 상식을 초월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과거 숱하게 등장했던 대립교황/대립주교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적어도 대립주교들은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집단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이미 상이해질대로 상이해진 동서 교회가 각각 주교를 따로 선출하여 그 지역에 대한 재치권을 행사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일찌기 로마 시대 때 단성론자 교회들이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며 분립했을 때와 흡사했다. 이집트 지역에서 단성론 문제로 디오스코로스 1세(Διόσκορος Α': 444-454) 이후로 단성론자들과 칼케돈파가 총대주교를 서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었는데 (2~4편 참조), 이집트의 정교회는 최종적으로 537년 칼케돈파가 당시 총대주교로 세워진 테오도시오스 1세(Θεοδόσιος Α΄: 535-567)를 인정하지 않았고 파울로스(Παυλος: 537-540)를 총대주교로 새로 옹립하여 테오도시오스를 여전히 총대주교로 인정한 단성론파 교회, 곧 콥트 교회와 영구적인 분열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키이우 수도대주교의 상황이 바로 이와 비슷한 것이었다.
이렇게 다시 출발하게 된 우크라이나의 정교회는 전열을 가다듬게 되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서 있는 땅은 바로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었다. 자연스럽게 국가로부터의 무관심과 핍박이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크라이나 지방에는 앞에도 언급한 바 있는 카자크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몽골 제국 시대로부터 형성된 집단으로 일종의 군사집단이자 용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드네프르(Днепр) 강 유역에서 살던 이들은 주로 동방 정교회를 신봉하는 우크라이나인들과 러시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을 '자포로제 카자크'라고 불렀다. 이들은 소위 자포로즈카 시치(Запорізька Січ)라는 일종의 자치지역들을 중심으로 점차 강성해졌는데, 처음에는 킵차크 칸국의 세력 안에 있었지만 우크라이나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그들의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연방은 이들에게 종주권을 행사하고 필요시 군사력을 빌리는 권리를 행사하되 유목민족인 카자크들의 자치를 어느 정도 허용하였다. 어차피 싸움이 붙어봐야 피곤해질 것이 뻔하니 연방 측에서도 적당히 카자크들과 타협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뒤로 하고 카자크들은 크림 반도 근처에서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따로 떨어져나온 크림 칸국을 신나게 약탈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브레스트 연합 이후 점차 세력이 커진 카자크들에 대한 폴란드 정부의 종교 정책이 보다 강경해지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당시 반종교 개혁(21편 참조) 바람이 불면서 동방 지역에서도 로마 가톨릭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동방 정교회 성격을 배격하는 각종 운동이 휩쓸었다. 이에 따라 동방 교회 신도들, 특히 자포로제 카자크들은 큰 위협과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점차 불만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종교 문제는 분명히 그들의 봉기를 부추기고 있었다. 정교회 신도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신앙을 보장한다는 것은 카자크의 자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카자크의 세력도 워낙 커졌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위세도 40여년전 모스크바를 점령한 때에 비하면 다소 꺾여있었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카자크 지도자들은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였고, 결국 흐멜니츠키(Хмельницький)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게 되었으니 이것이 1648년의 일이었다. 흐멜니츠키는 적국인 크림 칸국과도 협약을 맺는 등 치밀하게 봉기를 준비했으며 결국 키이우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도시를 손에 넣는 것에 성공했다. 키이우 함락은 폴란드 정부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고, 카자크들은 보다 우위에 선 입장에서 협상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맺어진 즈보리브(Zboriv) 협약에 따라 카자크들은 전보다 훨씬 광범위한 자치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테니아 지역에서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 관할의 정교회가 특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심지어 연방 의회에는 키이우의 동방 교회 측 수도대주교에게 자리를 줄 것이 요구되었다. 루테니아 지역에서 흐멜니츠키는 사실상 왕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카자크들의 단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551년에. 폴란드 정부군은 흐멜니츠키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8만명 정도의 대군을 파견했으며, 베레스테츠코(Берестечко)에서 벌어진 회전(會戰)에서 압승을 거두게 된다. 여기서 심각한 군사적 타격을 받은 자포로제 카자크들은 비록 바토흐(Батог)에서 복수를 감행하지만 베레스테츠코에서 잃은 병력에 비하자면 작은 승리였고, 결국 대안을 생각해봐야 했다. 흐멜니츠키는 처음엔 카자크들의 나라를 건설하여 독립하자는 거창한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독립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손실을 경험한 뒤였던 것이다. 결국 카자크들은 오스만 제국의 봉신(封臣)이 되어 안정적으로 자치를 인정받기를 희망하기 시작했고 오스만 정부와 함께 협상을 시작했다.
원래 흐멜니츠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에 대해 봉기를 일킨 그 해에 모스크바의 차르 알렉세이 1세(Алексей I)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있다. 카자크들은 모스크바 차르국과 같은 동방 교회를 신봉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차르국의 군사력을 든든히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왔다. 이 협상을 위해 예루살렘 총대주교도 카자크들을 지원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할 정도였다. 그러나 차르 알렉세이 1세는 과거 폴란드에게 당한 비극이 초래한 트라우마에 휩싸여 있었던지라 도저히 폴란드 왕국을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저 소극적으로 대응하기만 했다. 그 결과 카자크들이 폴란드에 의해 밀려 패배를 거듭할 때에도 적극적인 군사력을 제공하지 않아 빈축을 사기만 했다. 하지만 이 계륵(鷄肋)같았던 카자크들이 갑자기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안에 들어간다고 하자 러시아 귀족과 장군들은 깜짝 놀랐다. 카자크들이 강력한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면 모스크바 차르국의 안위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1652년 차르 정부는 카자크들을 돕기로 결의하였고 이듬해인 1653년에는 차르국 내의 최고 의결 기구인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를 개최해서 자포로제 카자크와의 연합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페레야슬라브(Переяслав)라는 도시에서 카자크 고위급과 차르의 특사가 만나 협상한 끝에 현재는 온전한 문서로는 전해지지 않는 페레야슬라브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모스크바 차르국이 자포로제 카자크 군대를 보호하고 동맹을 체결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1654년에 모스크바 차르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실제적인 군사력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모스크바와의 연합은 당시 키이우 수도대주교였던 실베스트르 코시프(Сильвестр Косів)의 강한 반발을 샀다. 코시프는 루테니아 교회가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의 관할권 하에 있다는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였고, 모스크바 차르국의 영향이 확대됨에 따라 러시아 정교회의 입김이 강해지게 되는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자크들의 입장은 결연했으며, 모스크바 차르국도 신속하게 움직이면서 수도대주교의 반대 운동은 무력화되었다.
러시아-폴란드 전쟁은 결국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키이우를 초함한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이 모스크바 차르국에 할양되었다. 이 전쟁 와중에 카자크의 지도자였던 흐멜니츠키 사후 카자크들은 모스크바 차르국과 폴란드 왕국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열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깎아먹었고, 결국 자치를 주장하는 카자크들의 영향력은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으로 쪼그라들게 되었다. 자연히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서구화된 서부 지역과 페레야슬라브 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동부 지역으로 나눠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현대까지도 수많은 문제들을 양산하고 있다.10
한편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동방 가톨릭 교회가 침체하게 되고 동방 교회의 세력이 다시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을 관리하는 나라는 모스크바 차르국이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교회에 대한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동방 교회의 특징상 교회의 치리 권역은 해당 나라의 국경과 어느 정도 일치했기 때문에 나라의 영토가 넓어지게 되면 그 나라 자치 교회의 관할 영역 역시 넓어지는 것과 다름 없었다.
키이우 지역이 모스크바 차르국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키이우 수도대주교는 자포로제 카자크들의 본거지인 치히린(Чигирин)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치히린에 자리를 잡은 수도대주교좌는 극히 불안정했고 대립주교가 서로 세워지는 등 분열을 겪었다. 비록 키이우에서 활동하던 신학자 라자르 바라노비치(Лазар Баранович)가 우크라이나 교회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어머니 교회로 섬기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의 지원 없이는 러시아 교회의 영향을 피하기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었다. 결국 키이우 수도대주교좌는 수년간 공석이 되었고, 1685년 새로 선출된 수도대주교 헤데온(Гедеон)은 교회의 붕괴를 막고자 모스크바에 가서 모스크바 총대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았는데, 이는 루테니아 지역의 동방 교회는 최종적으로 러시아 교회 관구 산하의 자치교회가 되었음을 공포하는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