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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은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집단들을 '밀렛(millet)으로 명명하고 각 밀렛의 최고 책임자를 세워 비무슬림들을 관리시켰다. 정부는 이러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비무슬림 국민들에게 이슬람 종교적 색채가 짙은 통치 질서를 강제하지 않고도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하에서 충성스런 신민으로 만들길 원했다. 주요 밀렛으로는 과거 비잔티움 제국에서 정교회를 신봉하던 사람들을 일컫는 룸 밀렛(millet-I Rum), 유대인 밀렛, 아르메니아인 밀렛, 시리아 정교회 밀렛이 있었다. 특히 룸 밀렛의 최고 책임자로서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가 임명되었는데, 총대주교가 가지는 정치적 이권을 바탕으로 그리스계의 유력 가문들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정교회와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한 과거 비잔티움 제국의 재건을 바라는 열망이 커져갔다.
그런데 19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점차 허약해지고 '유럽의 병자'로 멸시당하게 되면서 밀렛을 기반으로 한 제국 통치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다수로써 자신들을 통치하던 투르크와는 종교도, 민족적 특징도 다른 소수 민족들이 점차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서 이탈하려는 조짐을 보였던 것이다. 물론 18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이 이러한 불온한 움직임에 강경하게 맞서오긴 했지만 무력으로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정신적인 민족 독립의 사상이 서유럽으로부터 몰려오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바로 나폴레옹의 등장이었다. 비록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은 몰락했고 빈 체제가 등장하여 구 체제를 복권시켰지만, 나폴레옹이 전 유럽에 뿌린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까지 말소시킬 수는 없었다. 오스만 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19세기부터 민족주의적인 움직임이 각지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 그래도 허약해진 중앙 정부는 이러한 피지배층의 운동으로 인해 더욱 더 통치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개혁의 의지가 있었던 술탄들을 도와 당시 오스만 제국의 정치외교가였던 무스타파 레시드 파샤(Mustafa Resid Pasha)가 1839년 11월 3일에 칙령을 내려 저 유명한 탄지마트(تنظيمات)라고 불리는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오랜 기간의 노력에도 이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가장 먼저 조직적인 반기를 든 쪽은 세르비아(1804)였고, 루마니아(1821)와 그리스(1821)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보스니아(1831)인들도 봉기를 일으켰고,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은 발칸 각국 사람들에게 민족주의에 기반한 독립을 염원하게 하였다. 여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처리를 둘러싼 빈 체제 하의 유럽 각국들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는데, 특히 빈 체제로 인해 프랑스가 고립되자 동쪽에서 러시아가 패자(覇者)로써 군림하기 시작했고, 영국과 프로이센,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을지 결정하기 위해 치열하게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오스만 제국을 집어삼키면서 남하하면 지중해로 진출함과 동시에 강력한 해군을 육성할 수 있고, 또 정교회 국가라는 측면에서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손에 넣는 것은 제국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데에도 엄청난 이득이었다. 그래서 대체로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 내의 소수 민족들의 봉기와 독립을 지원해왔다.
그 결과 그리스는 1832년 독립을 쟁취하여 그리스 왕국을 세웠다. 세르비아인들은 1817년 세르비아 대공국으로서 반독립 상태의 완전한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1828년에 있었던 러시아-오스만 전쟁의 결과 현재의 루마니아 일부 지역은 러시아의 보호령이 되었다. 1852년에 몬테네그로 대공국이 독립하게 되었고, 군사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으나 불가리아 역시 이러한 민족주의적 독립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끈질힌 민족주의 운동은 발칸 반도를 무척이나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심각한 군사 행동이 도미노처럼 이어져 반도 전체에 전쟁의 화를 입힐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았다. 그리고 결국 1875년 헤르체고비나(Hercegovina)에서 봉기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를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이 칼을 빼들었으나 이에 세르비아 대공국과 몬테네그로 대공국이 오스만 제국에 이 때를 호기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선전 포고를 하여 전쟁에 돌입하였고, 크림 전쟁에서 패배했던 러시아 역시 오스만 제국을 징벌하기 위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전쟁에 개입하였다. 휴전을 제의한 오스만 제국의 요청에 따라 산 스테파노(San Stefano)에서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의 결과 불가리아가 독립하였고,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 대공국의 영토가 확장되었으며, 보스니아 빌라옛(vilayet)은2 자치권을 획득하게 되었으나 이후 30년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감시 하에 있게 되었다. 하지만 유럽 열강들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휴전 협정에도 개입하여 새로 베를린 조약을 체결하여 이를 갱신했는데, 여기서 루마니아의 독립도 허가되는 대신 불가리아는 세 부분으로 쪼개어진 채로 독립되었다.
이것은 국가의 독립 뿐 아니라 교회의 독립을 말하기도 했다. 원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는 총대주교좌가 설치되었던 곳이었던 데다가 (19편 참조) 이 지역에 사는 민족이 그리스인이 아닌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이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점령 이후 이 지역의 총대주교좌의 치리 능력은 상실되어 어떠한 독립적인 선언이나 고지가 없었음에도 사실상 총대주교좌가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17-18세기 이후 그리스계 유력 가문들의 영향력이 룸 밀렛 사이에서 확대되면서 그리스인들에 의한 교회 치리가 강화되었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이들 지역을 다시 콘스탄티누폴리스 세계총대주교좌가 관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런 불명확한 상황을 일신하기 위하여, 정치적으로 새로 독립한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로부터 독립을 요구할 것이 분명하였다.
이러한 발칸 국가들의 정교회들의 독립은 각 지역들이 민족주의로 똘똘 뭉쳐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독립의 흐름 속에서 콘스탄티누폴리스 세계총대주교의 직접 치리하는 영역은 과거 찬란했던 비잔티움 시대에 비하면 한없이 쪼그라든 형상이었다. 현재의 이스탄불(Istanbul) 근방 조금과 그리스 북부, 그리고 애게 해에 딸린 섬들이 직접적인 치리를 받는 영역일 뿐 대부분은 명목상 세계총대주교구 산하에 있으나 각 지역의 수장들이 실질적으로 자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발칸 반도에는 정교회 신자들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을 끝까지 깊게 받았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로마 가톨릭이 우세였고,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4 그리고 알바니아에는 무슬림 인구가 대다수였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인종과 종교가 한데 뒤섞여 있다보니 한창 민족주의가 크게 위세를 떨치게 될 때 가장 위험하게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발칸 반도였다. 그래서 프로이센의 재상이었던 오토 본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작은 불꽃 하나로 인해 우리 모두를 집어 삼킬 폭발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게 언제 일어날 지는 모르겠으나 어디서 일어날 지는 말해 줄 수 있다. 분명 그 멍청한 일이 발칸에서 터지고 말 것이라는 것을.
비스마르크의 예언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30년전의 베를린 조약을 결정 사항을 철회하고 보스니아 빌라옛을 아예 합병해 버리는데, 독립하여 자신들의 국가를 세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보스니아인들과 이 지역에 사는 세르비아인들의 원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어 1912년부터 벌어진 발칸 전쟁의 포화 속에서 각국 열강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원으로 인해 세르비아인들이 점유하고자 했던 알바니아 지역이 독립해 버리게 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를 향한 세르비아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태세였다. 세르비아인들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원수 그 자체였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Franz Ferdinand)는 다민족 국가인 제국을 연방 형태로 재편하고 각 민족, 지역별로 광범위한 자치를 실시하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스니아에 거주하던 세르비아인들은 그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지역의 중심 수도인 사라예보(Sarajevo)를 방문한다는 계획을 듣고 그를 암살할 음모를 꾸민다. 그리고 1914년 6월 28일에 정말로 황태자와 그의 처 조피(Sophie)는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라는 젊은 세르비아인 학생의 총알에 의해 숨지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1차 세계 대전에서는 종교 간의 갈등이나 반목, 혹은 살육과 보복 등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대신 1차 세계 대전은 전 유럽의 황폐화와 동시에 인간의 이성에 대한 회의를 몰고 왔다. 무엇보다도 참혹한 현실에 대해 뚜렷한 해결책도, 평화도 제시하지 못했던 기독교에 대한 반발은 더욱 커졌고 교회에 냉소적인 시선이 전보다 더욱 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종교에 대해 반대하는, 혹은 종교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전체주의적 정치 사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를 위시한 사회주의자들은 종교를 기득권을 가진 유산 계급이 노동자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인민의 아편(das Opium des Volks)'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반종교적인 표어는 19세기 중반 이후 지성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던 유물론적 사고와 결합하게 되면서 보수적인 교회 학자들이 보기에는 극히 반가톨릭적인 불온한 움직임이 유럽을 흔들 기세였다. 이미 31편에서도 등장했지만 교황 비오 9세(Pius IX: 1846-1878)의 회칙과 칙령들은 자유주의적인 신학과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심을 강하게 표출한 바 있으며 많은 사람들 역시 그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태동 자체가 자본주의의 이면에 가려진 사회 문제와 그에 따른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학자들과 성직자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기독교의 이상과 어떤 부분에서 일치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되었고 그 결과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양태로서의 종교 운동이 태동하게 되었다.
그 정점에는 비오 9세를 이은 교황 레오 13세(Leo XIII: 1878-1903)였다. 레오 13세는 교황 즉위 전 베네벤토(Benevento)의 행정관으로 재임할 당시 빈민들을 구제하고 이들을 억압하던 귀족들을 징벌할 정도로 가난한 이들로 인한 사회 문제에 관심이 깊었다. 그는 1891년 '레룸 노와룸(Rerum Novarum, 새로운 사태)'이라는 회칙을 내렸는데 이는 당시 노동자 문제에 대한 깊은 우려와 자신의 생각, 그리고 기독교적인 해법을 모색하려고 시도한 획기적이고 역사적인 행동이었다. 적이라고 생각했던 가톨릭의 수장이 이런 진보적인 관점으로 자신들의 문제에 공감해 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사회운동가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레오 13세가 사회주의를 지지한 것은 결코 아니고, 가톨릭은 사회주의의 논리를 결코 포용할 수 없었기에 여기서 펼친 레오 13세의 논리는 그들 눈에는 매우 제한적인, 여전히 기득권과 유산 계급을 옹호하는 것을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구체제의 모순은 결국 혁명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18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시민들이 왕정에 반대하여 들고 일어났던 것과는 조금 다른, 곧 사회주의의 이름을 내건 혁명이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에서 일어났다. 1917년에 있었던 대규모 시위의 결과 혁명이 발발하였고 당시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Николай II)가 퇴위(退位)를 선언함으로써 제정 러시아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케렌스키(Керенский)가 이끈 임시정부는 7개월만에 붕괴되었고, 그 뒤를 트로츠키(Троцкий)와 레닌(Ленин)이 이끄는 볼셰비키(большевик) 세력이 장악하였다. 이들은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음을 천명하였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의 공산주의 국가였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한 소비에트 연방은 내전이 끝난 뒤 적극적인 공산주의 정책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종교 정책이 빠질 수 없었다. 이미 19편에서 언급한 바대로 수많은 정교회 성직자들과 신도들이 무신론 정권인 소비에트 정권 하에서 참혹한 박해를 받아야 했으며 러시아 교회의 교세는 크게 꺾이게 되었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이러한 박해 정책은 쉼이 없었다.
수많은 고위급 성직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소비에트 연방에 충성을 다하지 않고 체제를 전복시키려 한다는 누명이 씌워졌고, 재판도 허용되지 않은 채 갖은 고초 끝에 결국 유형당하거나 총살당했다. 소비에트 정부에 적극 협조할 것을 천명한 당시 모스크바 수도대주교 세르기(Сергий)에 반대하는 수많은 성직자들은 차례차례 교계에서 제거당했는데 1936년에 과거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불린 레닌그라드(Ленинград)에서 세르기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은 모두 축출당하고 말았다. 결국 이 과정에서 러시아 교회의 기능은 마비되고 말았다. 이는 1941년 이오시프 스탈린(Иосиф Сталин)이 소비에트 연방의 독소 전쟁(獨蘇戰爭), 곧 대조국 전쟁(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을 이끌면서 인민들의 애국적 단합을 고취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정교회에 대한 외형적인 박해를 중지시킬 때까지 이어졌다.
한편 서방 지역에서는 전체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를 총통으로 삼고 나치(Nazi)라는 전체주의 정당의 일당독재만을 허락한 제3제국(Drittes Reich)이 있었다. 나치당은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를 장악하여 그 어떤 다른 의견도 허용하지 않았고, 이것은 초국가적 통치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히틀러를 비롯하여 그의 심복이었던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나 마르틴 보어만(Martin Bormann)은 교회의 영향력을 분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 중 하나라고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당시 교황은 나치당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는 점이다. 로마 가톨릭의 호교론적 입장에서 보면 이탈리아의 파시즘(Fascismo)이나 독일의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보다도 상술한 마르크스주의의 무신론(無神論)이 더욱 큰 문젯거리였다. 이미 소비에트 연방에 의한 동방 정교회 및 동방 가톨릭 교회의 박해를 목도한 바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신들의 관할 교구에서 사회주의의 확산을 저지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심지어 중세 이후부터 로마 가톨릭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이베리아 반도에서조차 왕정이 무너지고 좌파 계열이 득세한 공화정이 채택되면서 가톨릭의 지위는 실추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치당이 독일에서 권력을 획득하기 이전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다수당은 바로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이었는데 이 당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단체였다. 자연히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사민당의 반대쪽에 힘을 실어주길 원했고,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치당은 이에 합당한 후보였다. 그 결과 가톨릭 정당으로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던 독일 중앙당(Deutsche Zentrumspartei)은 나치 당이 열렬하게 호소한, 의회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Gesetz zur Behebung der Not von Volk und Reich)', 소위 전권 위임법(Ermächtigungsgesetz)에 찬성 몰표를 던졌는데 여기에는 비오 11세와 교황청 관리들, 그리고 그들의 결정에 순복하는 독일 내 성직자들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 보상으로 제국 내에서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독일 내에서의 박해를 경험한 뼈아픈 과거가 있다. 때는 1872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 시절, 당시 맹렬하게 위세를 떨쳤던 문화투쟁(Kulturkampf) 정책으로 인해 가톨릭 학교와 수도원 활동이 모두 금지되고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이 모진 고초를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교황 비오 11세(Pius XI: 1922-1939)는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독일의 여러 주(州)와 협정을 맺는 형식으로 가톨릭 교회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았는데 1924년에 바이에른(Bayern), 1929년에 프로이센, 그리고 1932년에는 바덴(Baden) 주와 협정을 맺었던 전력이 있었다. 1933년에 전권 위임법을 통해 나치 독일에 의한 일당독재 체제가 완성되자 교황청과 나치 독일간의 협상은 급물살을 탔다. 원래 가톨릭 교회 내에는 히틀러의 행보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많았고, 반유대인주의적인 나치당의 강령에 대해 우려를 표했으나 볼셰비키 세력의 확장을 엄금하려는 교황의 의지는 단호했다. 교황청에서는 훗날 후임 교황 비오 12세(Pius XII: 1939-1958)가 되는 국무원장 추기경 에우제니오 파첼리(Eugenio Pacelli)를 협상 대사로 내보냈고, 독일측에서는 부총리인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pen)이 나왔다. 이들은 7월 20일에 최종적으로 제국협약(Reichskonkordat)을 체결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로마 가톨릭에게 비수를 내리꽂는 일이 될 줄은 비오 11세도, 이후의 비오 12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치 독일은 협정을 맺은 다음 해인 1934년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이라는 사건을 일으켜 자신들을 반대하거나 혹은 차후에 잠재적인 적이 될 만한 세력권의 주요 정치 인사들을 모두 암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여기에는 좌익 세력으로서 아돌프 히틀러와 대립했던 그레고어 슈트라서(Gregor Strasser), 바이마르 공화국 전 총리 쿠르트 폰 슐라이허(Kurt von Schleicher)이 포함되어 있었고, 가톨릭 교회와의 협정을 주도한 부총리 프란츠 폰 파펜의 사람들, 곧 에리히 클라우제너(Erich Klausener), 에드가 융(Edgar Jung)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나치 독일 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톨릭 측 인사는 모두 정치 생명을 잃게 되었다. 이는 독일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정치적 보호망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추후의 박해에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음을 뜻했다.
이러한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독일의 개신교회들은 제국 교회(Reichskirche)라는 극히 이단적이고 나치만을 위한 어용 교회로 통합될 것을 강요받았고, 가톨릭 청년단체은 해체되었으며 많은 성직자단과 수녀들은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유전병을 앓는 사람들을 말살하기 위한 법인 유전질환자녀출산방지법(Gesetz zur Verhütung erbkranken Nachwuchses)을 통과시키는가 하면,7 학교에서 십자가를 모두 제거해 버렸다. 반유대주의 정책은 점차 노골화되었고 나치의 정책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은 투옥되기 시작했다.
로마 교황청도 가만히 앉아서 다가오는 피의 시간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1937년 회칙을 보내어 현 상황에 대한 깊은 우려의 뜻을 나타내었는데 놀랍게도 교황 회칙이 통상적으로 라틴어로 쓰이는 것과는 달리 이 회칙은 독일어로 쓰여졌다. 제목은 'Mit brennender Sorge(뜨거운 걱정을 가지고)'이며 당시 교황의 서한은 독일 내부 반입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기 때문에 가톨릭 성직자들은 이를 밀반입하여 종려주일에 읽히게 하였다. 나치 독일 정부는 난리가 났고 게슈타포(Gestapo)라 불린 비밀 경찰들이 각 교회들 돌며 교황의 회칙을 모두 몰수해 갔다.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에 대한 탄압과 감시가 더욱 무거워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집단 수용소로 끌려갔다. 소위 교회 투쟁(Kirchenkampf)의 마지막 단계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에 대한 나치의 보복은 다하우(Dachau)의 집단 수용소에서 악명 높게 이뤄졌다. 사람들은 끔찍한 대우를 받으며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이곳에 보내진 총 2720명의 성직자들 중의 95% 정도는 모두 로마 가톨릭 성직자였고 그 중 대부분은 폴란드 성직자였다. 유럽에서의 2차 세계 대전은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부터 시작했는데, 히틀러는 독일의 터전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폴란드와 폴란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특별히 증오했고, 그러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에 대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수많은 폴란드 성직자들이 모진 고초를 당했고, 특별히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들 108명은 훗날 폴란드 출신의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Ioannes Paulus II: 1978-2005) 때 복자로 선포되었다.
이 과정 중에 해당 지역의 교회들은 붕괴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세계 대전 자체가 끔찍한 일이고, 또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었는데, 교회라고 별 수 있겠는가? 수많은 유력한 성직자들이 순교하거나 성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 교회의 치리는 위태로워졌으며 긴급 상황 속에서 수년간 온갖 고생을 겪으며 교인들을 돌봐야했다. 특히 추축국의 손아귀에 들어간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발칸 반도의 가톨릭 교회는 나치 독일의 영향력 하에서 크게 신음하게 되었다.
또한 추축국이 점령한 지역에는 비록 작은 규모이긴 했으나 동방 정교회 폭압적인 나치 독일 체제 하에서 역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1942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났다. 유대인 대학살을 계획하기도 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는 히틀러를 만나러 가던 도중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가 보낸 요원 둘에 의해 암살을 당하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이들이 숨어들어간 곳이 프라하에 있는 성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정교회 성당이었다. 당시 프라하의 주교였던 고라즈(Gorazd)는 이 일로 인해 순교를 당하였고, 당시 모라비아(Moravia), 보헤미아(Bohemia) 지역의 모든 정교회들은 폐쇄당하고 활동을 정지당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던 암울한 시기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중간중간 세계 대전의 비극을 성토하는 목소리를 내곤 했으나 직접적으로 파시즘과 나치즘을 비난하지 못했으며 지금까지 걸어온 자신의 외교 정책에 발이 묶인 모양새가 되고 말아 추축국은 물론 연합국으로부터도 비난을 받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교황청이 할 수 있는 유효한 외교적 책략이란 전무했고 유대인 학살의 참극을 최소화하기 위한 물밑작업이 전부였다. 세계 대전의 참상에서 자유로웠던 곳은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던 아메리카 대륙의 교회, 그리고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의 중립 선언 하에서 국가 종교로서의 활동을 보장받았던 스페인의 가톨릭 교회 뿐이었는데 이들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상황들을 해결할만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애초에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동서교회의 분열상은 여실히 드러났고, 이를 이용한 정치 세력과 과격한 사람들에 의해 교회는 또다른 슬픈 역사가 파생되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서로 화해하고 보듬어주기도 모자랄 이 시기에도 적대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남부 지역에 살던 슬라브 민족들은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독립국을 이루기를 희망했고, 이는 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인 세르비아의 팽창주의와 맞물렸다. 결국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등의 지역을 모두 합병하여 유고슬라비아(Југославија, Jugoslavija) 왕국이 탄생하게 된다.09 그러나 이 나라는 1941년에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공격을 받아 멸망당하고 모든 지역이 주변의 추축국인 독일, 헝가리, 불가리아, 이탈리아, 알바니아에 의해 분할 점령당한다. 다만 크로아티아 지역에는 크로아티아 독립국(Nezavisna Država Hrvatska)이라는 추축국의 괴뢰국 및 보호국이 탄생했는데, 이 나라는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자 파시스트 단체 우스타샤(Ustaša)와 독재자 수령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c) 의해 좌지우지되는 그야말로 막장 국가였다.
이 국가의 지독한 크로아티아인 중심의 민족주의는 나치의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원래 유고슬라비아의 태동 때부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슬라브계 민족이라는 것만 같았을 뿐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하는 다른 국가, 민족과는 문화와 풍습이 달랐으며 결정적으로 이들은 종교가 달랐다. 크로아티아인은 로마 가톨릭, 세르비아인은 정교회, 그리고 보스니아는 이슬람교 이런 식이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를 주도하는 가장 큰 세력인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와는 극렬하게 충돌할 수 밖에 없었는데 안 그래도 세르비아 왕가의 통치 하에서10 소외당했다고 불만을 가졌던 크로아티아인들은 추축국의 침공 이후 급성장하게 된 극단적 민주주의 하에서 세르비아인을 향한 폭력성을 아주 자유롭게 드러내게 된다. 나치에게서 아주 못된 것들만 제대로 익혀 써먹은 것이다. 많은 지역에서 수백, 수천명의 세르비아인이 학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심지어 입법평의회의 의장이었던 미로슬라브 자니치(Miroslav Žanić)는 아래와 같은 소리를 연설 중에 할 정도였다.
이 나라는 오직 크로아티아인의 나라여야 합니다. 크로아티아인만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그리고 수세기동안 우리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고 기회만 있으면 다시 우리를 위기에 빠뜨릴 세르비아인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려서는 안 됩니다.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폴란드의 오시비엥침(Oświęcim)에 수용소를 만들었던 것처럼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야세노바치(Јасеновац, Jasenovac)에 수용소를 만들었다. 3년 반동안의 짧은 시간 동안 약 70만명이 이곳에 수용되었다는 보고가 있는데 여기에서 약 7-8만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음식과 영양 상태는 최악이었으며 여기에 수용된 세르비아인들, 유대인, 로마인들은 호된 노동과 고문, 그리고 이유 없는 학살에 고통받아야 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이들을 손쉽게 학살하기 위해 손에 차는 단도로 악명 높았고, 세르비아인들은 무덤도 없이 그저 주검이 수용소에 널브러져 쌓여 있는 참상을 목도해야만 했다.
문제는 여기에 종교 대립이 개입한 것이다.
당시 크로아티아의 로마 가톨릭 교구 대주교는 스테피나치(Stepinac)였는데 크로아티아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극단주의적인 우스타샤를 지지하고 환대했을리가 없다. 대주교는 심지어 이런 말을 했다.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은 북극과 남극같아서 하느님의 기적 없이는 절대로 연합할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보다도 동서교회의 분열이 유럽에 내린 가장 큰 저주입니다. 여기에는 도덕도, 원리도, 진실도, 정의도, 정직도 없습니다.
추축국조차도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제대로 된 나라로 생각하진 않았던 듯하며 심지어 바티칸의 교황까지도 이를 공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스테피나치 대주교는 공공연히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찬양했고 옹호했다. 그들의 수령이 된 안테 파벨리치에게 지혜의 영으로 채워달라는 공개적인 강복 기도를 할 정도이니 말이다. 게다가 성직자 뿐 아니라 민족주의에 강하게 사로잡힌 몇몇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도 우스타샤에 투신하여 세르비아인 타도에 앞장섰다.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가 가장 악명높은데 그는 나중에 야세노바치 수용소의 고위급 책임자가 되어 거기서 벌어진 학살,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먼 비도덕적인 모든 일의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크로아티아인 가톨릭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이 세르비아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직접적 증거와 증언이 있다. 이러한 끔찍한 3년 반의 시간 동안 세르비아인들은 학살당하거나, 추방당하거나,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개종당해야 했다. 수십만에 이르는 세르비아인들이 이승을 또는 고국을 등져야 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약 80만명의 세르비아인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이것은 크로아티아 로마 가톨릭 교구만의 책임인 것일까? 많은 역사 자료들은 바티칸의 교황청 역시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자그레브(Zagreb)에 있던 교황 대사는 우스타샤 정권 하에서의 개종 상황을 파악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고, 이런 폭압적이고 비정상적인 학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었다. 물론 스테피나치 대주교도, 교황 비오 12세도 직접적인 반 추축국 활동을 벌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종교인이라고 해서 국적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크로아티아인의 국가가 세워지는 것을 지지했던 것도 우리가 힐난할 수는 없다. 또한 세르비아인 가톨릭 교인이 증가하는 것을 보며 내심 기뻐했을 것이라는 것 역시 이해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학살 정책이 진행되는 것을 확인했을 때 이를 단호히 거부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가톨릭 교회 내에 있었기를 바라는 것이 너무 큰 무리인 것일까? 세르비아인들은 3년 반동안 생지옥을 경험했고, 그것은 소비에트 연방의 요시프 브로즈(Јосип Броз, Josip Broz) 장군이 유고슬라비아 지역을 모두 점령하고 난 뒤에야 해소되었다.
그러나 비극은 또다른 비극을 낳는 법. 수많은 우스타샤 중심인물들은 법정에 기소되지 않은 채 아메리카 대륙으로 도피하였고,14 대주교 스테피나치는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나 교황청은 그를 추기경으로 삼는 것도 모자라 순교자로 시성하는 것으로 맞대응했다.15 이렇듯 크로아티아인들에 의한 세르비아인 학살 문제는 제대로 처리되지 못했고, 이 때의 악감정이 해소되지 못한 것을 일단의 장치세력이 악이용하는 바람에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겨진 인종청소가 20세기 말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에 재현되고 말았다.16
가톨릭 교회 관계자들이 세르비아인 학살에 관여한 사실은 정교회 세계의 분노를 초래했고, 역으로 우크라이나의 동방 가톨릭 교회는 교회와 재산이 몰수당하는 불행을 겪어야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자신들의 통치 지역 전반에서 동방 가톨릭 교회의 세력을 크게 억압했으며 이는 러시아 정교회가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2차 세계 대전 후반 모스크바 총대주교직을 이어받은 알렉시 1세(Алексий I: 1945-1970)는 성명을 발표하여 가톨릭과 연합한 동방 교인들이 정교회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였고 교황 비오 12세와 대립각을 크게 세웠다.
세계적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이 참혹한 현실 앞에서까지 서로의 세력 유지와 확장을 위해 싸운 동서교회. 결국 그들이 얻은 것은 없었다. 오직 미움과 분쟁, 몰이해와 상처만이 가득한 승자 없는 전투였다. 그 결과 유럽 세계에서 기독교를 전심으로 따르는 신자의 수는 대폭 줄게 되었고 오직 무늬만 기독교인인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게 되었다. 교회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감소하였고, 과거 문화의 잔재로 치부될 뿐이었다. 많은 이들이 기독교의 필요성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고, 전후 복구 이후 태동한 냉전 시대, 그리고 공산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열풍 하에서 교회의 의미는 점점 퇴색되었다. 문제 많은 세계화 시대의 20세기에야 비로소 교회가 분열의 역사를 청산하고자 다각도의 노력을 벌이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