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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2-4

Religion 2-4

동서교회 대분열 4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4

유스티니아노스 대제의 간섭
Intervention by Justinian the Great


목차

  1. 유스티니아노스 대제의 종교 정책
  2. 삼장서 논쟁
  3. 유스티니아노스가 드리운 그림자
  4. 참고 사이트 및 출처

유스티니아노스 대제의 종교 정책

숙부 유스티노스 1세의 뒤를 이어 비잔티움 제국 황제가 된 유스티니아노스 1세는 과거 로마 제국의 영화를 재현하고자 하는 야심에 가득찬 인물이었다. 제국의 영토를 과거 찬란했던 로마 제국 수준으로 회복하고자 했던 그는 동고트 왕국의 지배 하에 놓여있던 서로마 제국 영토의 수복을 으뜸 과제로 여겼다. 이를 위해서는 당시 서로마 제국 지역에서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있던 교황과 손을 맞잡는 것이 필요했다. 정치적인 이유였든, 종교적인 이유였든, 아니면 그 둘이 적절하게 혼합된 결과였든, 유스티니아노스는 치세 초반에 칼케돈 신앙 고백을 정통 신앙으로 인정하였고, 로마 교회에 상당히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동시에 네 개의 세계 공의회가 변호하는 정통 신앙과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단성론자들의 위협에서 지켜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이미 그는 유스티노스 1세 재위 시절에 황제를 움직여 칼케돈 신앙 고백을 정통으로 인정한다고 선포하는 칙령을 내리게 하여 헤노티콘으로 대표되는 단성론자 포용 정책을 철회시키고 단성론자들의 세력을 억눌렀다. 또한 523년에는 아레이오스주의를 엄금하는 칙령을 반포하여 제국 내, 특히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잔존했던 아레이오스파를 교회로부터 모두 쫓아내었다.

삼위일체를 배격한 주장으로 인해 이단으로 단죄된 아레이오스의 초상화 1

그런데 아레이오스파 척결 정책은 서로마 제국 지역에서 큰 반발을 샀다. 왜냐하면 고트족을 비롯한 많은 게르만족은 아레이오스주의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과거 이야기를 하자면, 콘스탄티노스 1세가 죽은 뒤 제국은 셋으로 나눠져 그의 아들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이 때 형제들을 물리치고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된 자가 바로 콘스탄티오스 2세(Κωνστάντιος Β΄)인데 그는 아레이오스주의자였다. 그가 통치하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아레이오스주의를 강요당했는데 여기에는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리베리오(Liberius: 352-366)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콘스탄티오스 2세의 협박과 강요에 못 이겨 삼위일체론과 니카이아 신조를 강력히 지지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Αθανάσιος)를 단죄하는 문서에 서명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2 아무튼 이 시기에 많은 아레이오스주의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맛보며 제국 각지에 아레이오스주의 기독교를 퍼뜨렸는데 그 중에 울필라스(Ulfilas)라는 선교에 뛰어난 주교가 있었다. 그는 아레이오스주의자인 니코메데이아(Νικομήδεια)의 주교 에우세비오스(Ευσέβιος)로부터 주교품을 받았고, 도나우(Donau) 강을 건너 그 지역에서 살던 고트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그는 고트 문자를 창안하여 그리스어로 쓰인 성경을 고트어로 번역했고, 아레이오스주의에 입각한 다양한 저서를 남겨 ‘고트족 선교사’로서의 명성을 드높였다. 그의 영향력 아래 고트족은 아레이오스주의 기독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트족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마 제국 내에 깊숙하게 들어와 지내게 되었는데 동고트 족은 이탈리아 반도를 점령하였고, 서고트 족은 이베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폭넓은 영토를 지배했다. 이 두 고트 왕국의 종교가 모두 아레이오스주의 기독교였기 때문에 옛 서로마 제국 지역은 로마 교회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아레이오스주의자의 천국이 되었다. 심지어 아레이오스주의의 번영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로 넘어간 반달 왕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고트 족을 향해 복음을 전파하는 울필라스를 그린 그림 3

이와 같이 서로마 제국에서는 아레이오스주의 신앙이 로마 교황이 부르짖는 정통 신앙보다 우세했다. 그래서 유스티노스 황제가 칼케돈 신앙 고백을 강요했을 때 큰 불만을 품었던 것이다. 당시 동고트 왕국의 왕이었던 테오도리쿠스는 교황 요한 1세(Iohannes I: 523-526)에게 비잔티움 제국에 특사를 보내 반아레이오스주의를 표방하는 칙령을 철회하고, 아레이오스주의에서 이탈한 교회들이 다시 아레이오스주의로 돌아와도 괜찮다는 윤허를 받아내라고 강요한다. 압력에 못 이긴 교황은 어쩔 수 없이 사절단을 이끌고 콘스탄티누폴리스에 간다. 이에 유스티니아노스는 촛불과 십자가를 든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멀리까지 나와 교황을 극진하게 영접하였는데, 마치 사도 베드로를 만나는 것처럼 공손하게 대했다고 전한다. 아카키오스 분열이 종식된 직후였기 때문에 동서 교회가 모처럼 친밀함을 과시하던 때였다. 요한 1세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머물면서 아카키오스 분열 종식 이후 최초로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함께 성탄 및 부활절 전례를 집전하면서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 방문에서 교황 요한 1세는 테오도리쿠스 왕이 주문한 몇 가지는 황제로부터 양보받는 데 성공하지만 떠나간 교회를 다시 아레이오스주의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되돌리지 않았다. 요한 1세가 아레이오스주의자가 아닌 이상 테오도리쿠스 왕의 말을 따라 아레이오스주의를 번영하게 하는 정책을 지지할 리 없었다. 교황은 출발 전부터 테오도리쿠스가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비잔티움 제국이 내린 칙령에 반발하면서 아레이오스주의를 고집하려고 했던 것을 이미 알아챘고, 이에 대한 소극적인 반항으로써 동서 교회의 우의를 다지는 모습을 대외적으로 과시했다. 테오도리쿠스 왕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요한 1세는 로마에 돌아오고 난 뒤 얼마 안 되어 동고트 왕국의 수도인 라벤나로 체포되어 감금되었고, 거기서 굶주림과 고문에 못 이겨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교황의 선종은 유스티니아노스가 이탈리아 반도를 수복하기 위해 동고트 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할 만한 구실을 제공해 주었다. 제국의 판도를 넓히고자 하는 정치군사적 목적에다가 아레이오스주의라는 사특한 이단으로부터 핍박받는 칼케돈 정통 신앙 성도들을 구해내려는 종교적 목적을 덧대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나라든, 어느 국왕이든 거대한 정복 전쟁을 활발히 벌이기 위해서는 전쟁 중에 권력을 잃거나 국가 사정이 피폐해지지 않도록 제국 내부를 잘 단속하고 권력을 든든히 하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당시 유스티니아노스가 가장 경계해야 할 내부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재론할 필요도 없이 칼케돈 세계 공의회 결정을 둘러싼 양성론 지지자와 단성론 지지자 사이의 분쟁이었다. 물론 처음에 유스티니아노스는 교황 호르미스다와 협상을 벌이면서 칼케돈 신앙 고백 지지를 천명하였고 이를 통해 서방 교회의 손을 높이 들어주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노스는 자신의 종교 정책으로 인해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유스티니아노스의 종교 정책은 열렬한 칼케돈 옹호 정책에서 점점 중용 정책으로 옮겨가는 듯한 변화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황제를 막후에서 강력하게 보필하던 황후 테오도라(Θεοδώρα)의 영향력을 빼놓을 수 없었다. 비록 출생 신분은 천했으나, 그녀의 총명함과 유능한 정치력은 비잔티움 제국 내 어느 여성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높은 여성의 지위에 오른 테오도라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남편인 유스티니아노스 황제를 보좌했고 때로는 그를 압도했다.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테오도라는 단성론자로 알려져 있었고,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단성론자들을 위한 수도원을 설립하여 추방되거나 갈 곳을 잃은 단성론자들을 포섭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녀가 세운 수도원은 이내 그곳은 단성론자들의 중심지가 되어 황제가 이후에 펼치는 단성론 유화 정책의 근원처럼 여겨졌다.

(좌)유스티니아노스 1세4, (우)황후 테오도라와 시종들5들을 표현한 모자이크화

먼저 유스티니아노스의 첫번째 정복 전쟁의 칼끝은 동방의 사산조 페르시아를 향했다. 그는 치세 초반에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지만 531년 칼리니코스(Καλλίνικος)에서 대패하게 된다. 이 결정적인 패배를 극복하지 못한 유스티니아노스는 532년에 페르시아와 아페란토스 에이레네(απέραντος ειρήνη)6 조약을 체결하고 철군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은 페르시아에 막대한 양의 금을 배상금으로 지불하게 되었는데 이는 유스티니아노스 치세 초반에 매우 큰 재정적 부담이 되었다. 유스티니아노스는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자신의 제위를 위협하고자 반대파가 들고 일어난다면 이후 자신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이들이 반대파를 형성할 것인가? 생각해보건대 가장 그럴 듯한 명분은 역시나 단성론 논쟁이었다. 유스티니아노스는 칼케돈 신앙 고백 중심의 종교 정책에서부터 제국의 분열이 시작되리라고 내다 보았고,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힌 황제는 끊임없이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 사항에 대해 재고해 보자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유스티니아노스의 우려대로 그를 권좌에서 굴러떨어지게 만들 뻔한 거대한 사건이 터지게 된다. 바로 532년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일어난 ‘니카의 반란’이었다. 당시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원형 전차 경기장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파당을 이뤄 서로 다른 전차를 응원하였는데, 이 파당은 현재의 정당과 비슷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전차 경기장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장이 아니라 민심이 표출되는 정치판이기도 했다. 6세기 초에는 청색당과 녹색당이 주류를 이뤄 서로 대결하였는데, 청색당은 주로 상류 계급에 속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칼케돈 신앙 고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녹색당은 반대로 평민 계급의 단성론자 중심의 파당이었다. 이 두 파당의 정치 싸움은 가끔 폭동으로 번져서 황제가 직접 나서서 달래야 할 정도이기도 했는데 532년의 폭동은 너무 심각해서 성 소피아 성당(Αγία Σοφία)이 불에 타고 관공서 건물이 모두 파괴될 정도였다. 녹색당을 비롯한 황제 반대파들은 세를 불리더니 급기야 전임 황제인 아나스타시오스 1세의 조카인 히파티오스(Υπάτιος)를 황제로 추대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내전 상태로 몰아넣었다. 상황이 뜻밖에도 너무나 심각하게 흘러가는 바람에 황제는 배를 타고 도망갈 것을 고려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때 황후 테오도라가 “황제의 자색 옷은 훌륭한 수의”라며 비겁하게 도망치지 말고 당당히 반란에 맞서라고 직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유스티니아노스는 전략을 바꿔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게 되었고, 종국에는 전세를 역전시켰다. 니카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히파티오스가 처형됨으로써 비잔티움 제국 내의 소요 사태는 마무리 되었지만, 이 반란으로 인해 유스티니아노스가 녹색당, 그리고 단성론자들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함을 깨닫게 되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유스티니아노스는 적극적으로 공의회 개최를 추진하였고, 이듬해인 533년 칙령을 반포하기에 이른다. 이 칙령에서는 과거에 늘 단죄되었던 에우티케스, 아폴리나리오스, 네스토리오스를 단죄함과 동시에 신조에 특별한 추가나 수정이 없음을 명확히 했다.

겉으로는 별 것 없어 보이는 이 칙령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먼저 칼케돈 신앙 고백에 거대한 흐름을 주도했던 대교황 레오 1세의 편지에 대한 언급이 사라져 정통 신앙 확립에 큰 역할을 한 서방 교회의 영향력을 배제시킨 꼴이 되었다. 또한 이 칙령은 단성론에 열린 자세를 취함으로서 새로운 헤노티콘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유스티니아노스의 새 칙령은 헤노티콘에서 사용된 과격한 문장들을 두루뭉술하거나 혹은 어느쪽에서나 들어도 맞게 들리는 듯한 모호한 서술로 대체시킴으로써 신앙 고백과 관련된 논란을 피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칼케돈 신앙 고백을 철저하게 믿는 서방 교회가 이 칙령을 강하게 반대하지 않은 것은 당시 교황 요한 2세(Ioannes II: 533-535)가 비교적 유스티니아노스에게 너그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스티니아노스의 부탁대로 이 칙령에 반대하는 수도사들을 파문하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일련의 화합 정책은 단성론자들의 짧은 부흥을 가져왔다.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새 총대주교로 단성론자이자 칼케돈 신앙 고백에 반대하는 안티모스 1세(Ανθιμος Α΄: 535-536)가 임명되었고, 쫓겨나 있던 단성론자 세베로스가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초청되어 도시의 성직자들과 친교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 칙령으로 인해 동방 교회의 단성론 논쟁은 일시적으로 해소가 되었다.

이렇게 내부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유스티니아노스는 유능한 장군 벨리사리우스(Belisarius)를 통해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동고트 왕국을 정복하게 하였다. 당시 동고트 왕국은 테오하다드(Theohadad) 왕과 아말라순타(Amalasuntha) 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유스티니아노스는 왕국 내 분열을 획책하여 테오하다드로 하여금 아말라순타를 살해하게 하였고, 시칠리아(Sicilia)와 달마티아(Dalmatia)에 군사를 주둔시킴으로써 동고트 왕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이에 반발한 테오하다드는 요한 2세를 이어 교황이 된 아가피토 1세(Agapetus I: 535-536)를 콘스탄티누폴리스로 파견하여 비잔티움 제국이 군사적 도발 행위를 중단할 것을 탄원하게 하였다.

여기서 유스티니아노스의 정치적 감각이 또 한번 발휘된다. 이전부터 언급했듯 비잔티움 제국 황제 입장에서 로마 교황의 권위는 동고트 왕국의 왕의 권위보다 더 중요했다. 교황이 직접적인 군사력이나 행정력, 재정이 풍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위치는 적어도 어떠한 서방의 세속 권력이 넘볼 수 없는 그런 위치였다. 따라서 유스티니아노스가 이탈리아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아가피토 1세의 마음을 얻는 것이 필요했다. 물론 처음에는 단성론자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보인 아가피토를 질책하며 교황을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쫓아내려고 했으나, 교황의 올곧은 성품에 감화되었는지 이전의 교황 호르미스다와 긴밀하게 협력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아가피토 1세와 긴밀하게 협력하기로 다짐했고, 결국 황제는 종교 정책을 180도 바꾸기에 이른다. 세베로스는 이러한 상황을 짐작이라도 한 듯 다음과 같은 말로 당시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였다.

진짜 문제는 말이지, 권력을 가진 저 두 사람은 서로를 기쁘게 해 주길 원한다는 걸세

그래서 상황은 정말 손바닥 뒤집듯 단 1년만에 바뀌게 되었다. 안티모스 1세는 총대주교직에서 사임하여 수도원에 칩거하였고, 아가피토 1세는 세베로스를 체포할 것을 건의한다. 비록 유스티니아노스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으나 세베로스는 사실상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단성론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졌으니 영향력을 상실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아가피토의 부름을 받아 유스티니아노스가 서명하여7 안티모스 1세를 이어 총대주교좌에 앉은 사람은 메나스(Μηνάς: 536-552)였다. 그는 총대주교좌에 오른지 얼마 안 되어 536년 유스티니아노스가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개최한 주교 심의위원회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전임자 안티모스 1세는 이단으로 단죄되었고 세베로스는 악마 숭배자, 마술사 등으로 저주받으며 단죄되었다. 마치 조선 시대의 ‘환국’과도 같은 급작스런 종교 정책 변화는 단성론자들에게 파멸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단성론자의 성지로 여겨졌던 알렉산드레이아의 총대주교 테오도시오스 1세(Θεοδόσιος Α΄: 535-536)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소환된 뒤 파직되어 테오도라의 수도원에 사실상 감금되었고, 그 자리는 파울로스(Παυλος: 536-540)가 차지하게 되었다. 칼케돈 신앙 고백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파울로스를 적법한 총대주교로 섬겼고, 단성론자들은 파울로스를 인정하지 않고 테오도시오스 1세를 여전히 총대주교로 모셨다. 단성론자들은 파울로스를 따르는 자들을 황제파 교회라는 멸칭으로 폄하하여 불렀고,8 자신들은 콥트 교회(coptic church)로 독립하였다.

현재까지 이 분열은 그대로 유효하다. 현재 알렉산드리아에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세계총대주교와 상통하는 정교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2014년 현재 테오도로스 2세)와 칼케돈 공의회 결정을 거부하는 오리엔탈 정교회의 하나인 콥트 정교회의 교황(2014년 현재 타와드로스 2세)이 함께 있다. 한편 콥트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상통하는 세력이 분리되어 콥트 가톨릭 교회가 독립하였고 이 교회의 수장(2014년 현재 이브라힘 이삭 시드락) 역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 사진은 콥트 교회 주교들의 행렬.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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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장서 논쟁

숱한 회의와 논박 끝에 단성론자들을 압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성론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난제였다. 일련의 파멸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단성론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대부분 지역에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단성론을 신봉하고 있었다. 유스티니아노스가 단성론을 제국에서 뿌리 뽑으려면 제국의 신민들을 대부분 옥에 가두고 유능한 주교들을 모두 내쫓아야 했을 테지만 이는 제국 역량의 큰 손실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유스티니아노스 1세 치세의 영토 확장을 나타낸 지도10

골머리를 앓으며 의기소침했던 유스티니아노스에게 희소식이 전해졌으니 곧 540년에 비잔티움 제국의 명장 벨리사리우스가 동고트 왕국의 수도인 라벤나를 함락시켜 이탈리아 반도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유스티니아노스의 숙원 사업이었던 이탈리아의 수복이 최초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제국은 다시 예전 로마의 영광을 재현할 것 같았고, 서방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유스티니아노스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이제야말로 전 로마 세계를 아우르는 군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전제 권력을 통해 종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기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날로 깊어졌고, 그는 단성론 논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동방 교회를 일치시킬 수 있으리라는 신념 하에 신(新)칼케돈 신앙(Neo-Chalcedonian faith)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신칼케돈 신앙은 단성론을 주장하며 칼케돈 신앙을 거부한 비칼케돈 신앙 옹호론자들을 교회로 다시 돌이키기 위한 새로운 신학적 접근이었으며 이 새로운 사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거론된 사람은 네스토리오스를 강하게 비난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했던 알렉산드레이아의 총대주교 성 키릴로스 1세였다. 레온티오스(Λεόντιος)와 같은 동방 교회의 저명한 신학자들은 에페소스 공의회의 승리자이자 알렉산드레이아의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는 사람 중의 하나인 키릴로스의 신학을 상기시키며 칼케돈 공의회의 정당성을 신학적으로 바로잡고자 하였다. 즉 유스티니아노스는 비록 자신이 신학자가 아니더라도 황제의 권위를 십분 활용한 신학적 접근을 통해 단성론과 얽힌 모순과 문제점을 탁월하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던 모양이다.11

세베로스같은 극단적인 단성론자를 제외하자면, 알렉산드레이아 지방 신학자들의 사상적 근원에는 철학자 오리게네스(Ωριλένης)가 있었다. 그는 2~3세기 알렉산드레이아에서 활동한 사람이었으며 삼위일체론을 언급한 초대 신학자 중 하나였다. 다만 그의 신학은 비슷한 시기에 서방에서 활동했던 테르툴리아누스와는 달리 동일한 세 위격(位格)을 논하되 본체(本體, υπόστασις/hypostasis)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성자와 성령이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종속된 하느님임을 강조했으며, 성부 하느님 중심의 삼위일체론을 주장했다. 알렉산드레이아 학파가 신성을 중시하는 학풍을 가진 것에는 오리게네스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리게네스의 초상화. 신학 공부하는데 더욱 집념을 불태우기 위해 스스로 거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2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스티니아노스는 아가피토 1세와 협력하여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비칼케돈파 단성론자들을 붕괴시켰고, 또 세베로스 등의 단성론자들을 실각시켰다. 이때 승기를 잡은 칼케돈 옹호론자들은 알렉산드레이아와 상이한 주장을 펼쳤던 안티오케이아 학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다수였다. 그들은 이 분쟁에 더욱 깊이 개입하여 황제로 하여금 알렉산드레이아 학파의 우두머리격인 오리게네스를 단죄하고 비방하게 하여, 알렉산드레이아 학파와 안티오케이아 학파간의 분쟁에서 안티오케이아 학파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판을 짰다. 이에 영향을 받은 유스티니아노스는 단성론자와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서 오리게네스의 가르침을 해체시켜야 한다고 보았고, 결국 543년 오리게네스와 그의 신학을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칙서를 내렸다. 이 칙서에 동서 교회의 종교적 리더인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 메나스와 로마 교황 비질리오(Vigilius: 537-555)가 서명하였으므로 결국 위대한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단성론자의 반열에 세워져 단죄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단성론자였던 황후 테오도라는 이러한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특별한 계획을 진행시킨다. 먼저 그녀의 영향력을 등에 업은 팔레스타인 수도사 테오도로스(Θεόδωρος)가 카이사레이아(Καισάρεια)의 주교가 된다. 그는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오리게네스를 따르는 알렉산드레이아 학파 사람이었고, 따라서 오리게네스를 단죄하는 황제의 칙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훗날 제대로 된 반격을 가하기 위해 황제의 주변에서 끊임없이 영향력을 확대하며 적당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궁정에서 테오도라와 더불어 유스티니아노스 황제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고 당시 콘스탄티누폴리스에 교황 특사로 와있던 부제 펠라지오(Pelagius)의 권위를 누르게 되었다.

테오도로스의 계획은 단순했다. 당시 칼케돈 신앙 고백을 둘러싸고 논란에 휩싸였던 유명한 세 문집이 있었다. 바로 모프수에스티아(Μοψουεστία)에서 활동했던 동명이인 테오도로스(Θεόδωρος)의 저작물, 키루(Κύρου)의 테오도레토스(Θεοδώρητος)의 글, 마지막으로 에데사의 이바스(Ιβας)가 마레스(Μαρής)에게 보내는 편지가 그것이었다. 이 세 문집을 통틀어 「트리아 케팔라이아(Τρία Κεφάλαια)」라고 불렀는데, 우리 말로 번역하면 「삼장서(三章書, Three Chapters)」가 되겠다. 이 「삼장서」는 모두 오리게네스 혹은 알렉산드레이아 학파의 입장을 반박하는 신학 저서들로 안티오케이아 학파의 대표적인 저작물이었다. 테오도로스는 사람을 직접 고소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책들에 이단 혐의를 씌워 알렉산드레이아 학파의 역전을 기도했다. 그래서 테오도로스는 과거 알렉산드레이아 학파에서 안티오케이아 학파를 고소할 때 썼던 구식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여 「삼장서」에 네스토리오스파의 불온 서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이를 황제에게 고발했다.

결과는 효과적이었다. 유스티니아노스는 「삼장서」를 단죄할 경우 비교적 온건한 단성론자들이 마음을 움직여 제국의 교회 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544년에 「삼장서」를 단죄하는 칙서를 반포한다. 「삼장서」의 단죄에 서명하지 않은 주교들은 쫓겨날 위험을 감수해야 했으므로 동방의 주교들은 대체로 황제의 의견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동방의 네 총대주교들도 모두 처음엔 약간 반발했으나 곧 양보하고 서명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많은 서방 주교들은 「삼장서」 단죄에 매우 비판적이었고, 황제가 선언한 단죄에 찬성하는 행위을 칼케돈 신앙 고백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였다. 특히 당시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와 있었던 밀라노(Milano)의 주교였던 다키우스(Dacius)와 앞서 소개했던 부제 펠라지오가 강력한 「삼장서」 단죄 비판론자였다.

그러나 황후 테오도라의 영향력으로 교황이 되었던 비질리오는 유스티니아노스에 의해 강제로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압송되다시피했다. 그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는 교황이었지만 「삼장서」 단죄에 서명하라는 유스티니아노스의 압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기 때문에 결국 548년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서한을 보내 삼장서를 단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같은 결정은 마치 교황이 앞장서서 칼케돈 신앙 고백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인상을 심어주게 되었고, 로마 교황과 상통하는 다른 지역의 교회들로부터 항의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심지어 553년, 이탈리아 북부의 몇몇 교구들은 아퀼레이아(Aquileia)의 주교였던 마케도니우스(Macedonius)를 총대주교로 삼아 독립 관구를 만들고 로마 교황과의 상통을 끊어버리기까지 했다. 교황의 수위권 주장에 큰 오점이 생기게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교황 비질리오는 거듭 황제에게 간언하여 「삼장서」 단죄로 인해 생겨난 이 모든 분열을 해결하라고 촉구했고, 결국 유스티니아노스는 세계 공의회를 개최함으로써 이 문제의 돌파구를 찾기로 결정했다.

아퀼레이아에 있는 산테우페미아 대성당(Basilica di Sant'Eufemia) 13

제5차 세계 공의회는 553년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열렸다. 이번 공의회의 표면적 목적은 네스토리오스 및 오리게네스의 가르침을 단죄하기 위한 것이지만, 사실상 황제가 「삼장서」의 단죄를 공의회로부터 확증받으려고 한 요식 행위나 다름 없었다. 안타깝게도 황제의 압력에 대한 서방 교회의 냉담함과 신변 안전에 대한 걱정 등의 이유에서인지 서방 주교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고 참석자 대부분이 동방 주교들이었다. 거듭되는 회의 결과 작성된 법령에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다시 확인하는 문구와 함께 이전에 단죄되었던 사람들의 명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노스의 목적대로 「삼장서」와 관련해서는 테오도로스와 테오도레토스의 글들이 단죄되었고 이바스가 마레스에게 쓴 편지가 단죄되었다. 테오도로스는 아예 사람 자체가 파문당하였다.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열린 제 5차 세계공의회를 그린 그림 14

이 파문 선언문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알렉산드레이아의 총대주교이자 에페소스 공의회의 승리자인 키릴로스 1세와 그가 작성한 12개의 저주문이었다. 요컨데 유스티니아노스는 알렉산드레이아 학파의 사상적 연원인 오리게네스를 단성론자라는 이유로 단죄하였지만 단성론자들도 높이 성인으로 추대하고 정통 신앙 확립에 기여했던 알렉산드레이아의 총대주교 키릴로스 1세의 저작과 그의 사상을 강조함으로써 정통 신앙을 지킨다는 명분을 세움과 동시에 칼케돈 옹호론자들과 단성론자 양 진영을 모두 적당한 선에서 만족시켜 더 이상의 단성론 논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묘안을 강구했던 것이다.

교황 비질리오는 공의회의 결과문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항의했으나 오히려 황제와 공의회에 참석하고 있던 동방 주교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으며, 그는 이에 굴복하여 553년 당시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 에우티키오스(Ευτύχιος: 552-565, 577-582)에게 공의회 결과를 인정한다는 편지를 보내었다. 그는 최종적으로 554년 「삼장서」의 단죄를 재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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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노스가 드리운 그림자

결국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열린 제5차 세계 공의회는 유스티니아노스와 동방 교회의 승리로 끝났다. 비록 유스티니아노스의 신학적 입장은 알렉산드레이아 학파의 단성론에 다소 치우쳤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정통 신앙과의 조화를 꾀한 덕택에 최소한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만큼은 많은 이들이 무탈하게 황제의 뜻을 받아들였다. 또한 이 공의회를 기점으로 해서 전과 같은 극단적인 단성론 논쟁은 점차 소강상태를 보이기 시작했고, 유스티니아노스 황제의 치세도 번영기의 정점에 이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듯 유스티니아노스 대제의 종교 분쟁 관여는 일견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노스 대제의 종교 분쟁 관여는 제국의 교회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말았다. 우선, 신학적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해진 유스티니아노스는 공의회 이후 점차 단성론의 지엽적인 논쟁에 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사망 직전인 564년 극단적인 가현설(假現說, docetism)에 속하는 그리스도 수난불가능론파(Aphthartodocetism)를 지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수난불가능론파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육신이 보통 인간의 육신과 달라 부활 이전에도 썩지 않는 특별한 육신 혹은 환영이었다는 것으로 그 대표적인 예가 물 위는 기적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적 단성론이었고, 원래 할리카르나소스(Ἁλικαρνᾱσσός)의 주교였던 율리아노스(Ιουλιανός)의 의견이었다. 이 칙령의 반포는 당시 제국의 교회를 크게 경악하게 만들었고, 황제의 이러한 황당한 결정을 따르지 않은 총대주교 에우티키오스는 이듬해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에서 쫓겨나게 된다.

또한, 전제 황권이 제국의 정치적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종교 분쟁에 개입했기 때문에 그 결과 진정한 정통 신앙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매우 많았다. 게다가 유스티니아노스가 개인적으로 신앙에 열렬한 열심을 보였다 하더라도 정통한 신학자는 아니었기에 그의 의중대로 공의회가 흘러갈 경우 정통 신앙에서 이탈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국 그의 강력한 권력을 기초로 한 공의회를 통해 표면적으로는 단성론 논쟁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지만, 이후에 단성론 논쟁은 단활론(單活論, Monoenergism)과 단의론(單意論, Monothelitism)이라는 이름으로 그 모습을 교묘하게 바꾼 채 7세기까지 제국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 단성론 논쟁의 끝은 동서방 교회의 수장이 모두 이단으로 단죄받는 비극 혹은 촌극이었다. 680년, 콘스탄티노스 4세(Κωνσταντίνος Δ΄) 치세 때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제6차 세계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단의론이 이단으로 단죄받고 이의론(二意論, Dyothelitism)이 정통으로 인정받았다. 이 과정에서 이전 로마 교황이었던 호노리오 1세(Honorius I: 625-638)와 동시대의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세르기오스 1세(Σέργιοος Α΄: 610-638)가 이단으로 단죄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15

한편, 교황 비질리오는 약 8년간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억류 생활을 하면서 유스티니아노스의 의중대로 행하는 꼭두각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그는 재임 중에 “나는 내 행위에 대하여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전한다. 아무튼 비질리오의 재위 기간 동안 서방 교회는 큰 분열을 맞게 되는데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의 분열로 대표되는 이 「삼장서」 분열은 100년도 더 지난 698년에 가서야 겨우 회복되었다. 전임 교황들이 쌓아놓은 교황의 수위권과 위엄은 비질리오 교황 재위 기간 중에 급격히 추락하게 되었고, 비질리오 본인의 오락가락하는 결정 역시 교황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러한 분열과 교황권 추락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 비잔티움 황제의 「삼장서」 단죄와 이를 위한 수단으로써 이용된 세계 공의회에 있었으므로 서방 교회의 주교들은 비잔티움 제국과 동방 교회에 등을 돌리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동방 교회의 주교들과는 더욱 멀어졌다. 여기에 서방 교회의 자존심에 제대로 비수를 꽂는 사건이 이어졌으니 「삼장서」 단죄에 찬동하여 서방 교회를 분열의 장본인인 교황 비질리오의 후임 교황 선출에 관한 사건이었다.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펠라지오 1세(Pelagius I: 556-561)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 교황의 칙사로 와 있던 부제였다. 그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체류하면서 유스티니아노스의 신임을 받았는데, 교황 비질리오가 「삼장서」 문제로 인해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소환되었을 당시 그와 협력하면서 함께 머물러 있었다. 그는 비질리오에게 공의회에 참석하지 말고 대교황 레오 1세의 가르침을 받들라고 충고했으나, 비질리오가 유스티니아노스의 압력에 점차 굴복해 가는 모습을 보이자 이에 분개하며 교황 곁을 떠나게 된다. 그는 교황을 통렬히 비판하는 글을 쓴 죄로 파문당하였고, 또한 황제가 개최한 공의회를 비난하는 편지를 작성한 일로 인해 수도원에 유폐되고 만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적인 환난 가운데 펠라지오 1세의 입장이 바뀌게 된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비질리오가 로마 귀환 중 시라쿠사(Syracusa)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전해졌을 때, 황제와 공의회가 로마의 새 교황으로서 펠라지오를 순순히 선출해 줬을리가 없었을 테니까. 훗날 펠라지오는 편지에서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는 정통 신앙을 지키기 힘들었다고 고백하는가 하면, 그의 입장 변화는 ‘실수를 인정하는 태도’로서 아무런 하자가 없는 행위라고 자평했고, 이스트리아(Istria)의 주교들에게 쓴 편지에서는 세계 공의회의 결정을 일개 지방 교회 공의회가 판단할 수 없다고 하여 제5차 세계 공의회의 결정을 온전히 지지하는 태도를 보인다. 과연 그가 비질리오를 힐난한 이전의 펠라지오가 맞는가. 서방 교회 입장에서 펠라지오 1세는 마음을 바꾼 변절자였던 셈이었다. 어쨌든 그는 곧 풀려나 로마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로마의 교황이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위시한 동방 교회와 특히 세속 황제에 의해 임명된 전례가 없었던지라 그의 교황좌 등극은 많은 서방 교회로부터 반발을 사게 되었고 교황권과 서방 교회의 위신은 이렇게 깊게 다시 상처를 입게 된다.

아야 소피아는 '거룩한 지혜'라는 뜻으로 360년에 완공되었다. 이후 1453년까지 정교회 성당으로, 1931년까지는 이슬람 모스크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16

서방 교회가 난감한 상황을 맞닥뜨릴 당시 동방 교회는 전제 황권의 비호 아래 성장해 나간다. 이미 새로운 로마인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부와 정치적 영향력은 로마를 앞선지 오래되었으며 유스티니아노스 대제 시절 그 모습을 다시 갖춘 소피아 대성당이 비잔티움 제국에서 콘스탄티누폴리스가 행사한 종교적인 영향력과 위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비록 총대주교였던 에우티키오스가 유스티니아노스 치세 말기에 쫓겨나기는 했으나 그의 인기는 이로 인해 오히려 높아졌고, 그의 후임으로 지명된 요안네스 3세(Ιωάννης Γ΄: 565-577)와 유스티니아노스 대제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그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시민들의 열화과 같은 성원에 힘입어 577년 다시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좌에 오르게 된다. 시민들은 뜨겁게 그를 환호했는데 일설에는 그가 나귀의 등에 타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처럼 콘스탄티누폴리스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그가 어찌나 인기가 많았던지 그가 재취임하자마자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성모 성당에서 처음 진행한 전례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손으로 축성된 성체를 받고자 몰려들었고 이로 인해 성찬 전례 시간만 무려 6시간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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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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