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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2-5
Religion 2-5
동서교회 대분열 5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5
세계총대주교 직함
On the Title of Ecumenical Patriarch
이제 5편의 동방 교회 중심 인물인 요안네스 4세(Ιωάννης Δ’: 582-595)가 등장할 차례이다. 그와 세계총대주교(ecumenical patriarch)라는 직함에 대한 분쟁에 대해 논하기 전에 그의 일생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그는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Καππαδοκία) 지역에서 태어나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성직자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히 모든 종류의 육체적, 정신적 유혹에서 극복하는 수행에 통달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의 곧은 자세와 성품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고 동방 교회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의 별명은 네스테우테스(νηστευτής)로 금식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금식은 그에게 유혹을 뿌리치는 대표적인 수행 중 하나였다. 어찌나 금식을 열렬하게 지켰던지 그는 필요한 수준 이상의 식사는 일절 하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 상태가 매우 좋아 마치 구약에 등장하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했던 채식을 연상케 하였다.1 그러나 그는 단지 먹는 것만 절제한 것이 아니라 그 많은 시간을 기도와 명상에 집중했다고 전한다. 그는 황제 티베리오스 2세(Τιβέριος Β')에 의해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총대주교로 임명되었고 재임 기간 동안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구제 활동을 활발히 펼쳤으며 그 과정 중에 몇 가지 기적을 행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2
동방 교회에서 요안네스 4세의 위치는 서방 교회에서 교황이 가지는 것보다 어쩌면 더 확고했을는지도 모른다. 588년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였던 그레고리오스(Γρηγόριος: 571-593)가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동부 지역 관구였던 오리엔스(Oriens)를 통치하는 감독과 마찰이 생겨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소환되었을 때, 요안네스 4세는 동방교회의 주교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소집하였다. 과거에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주교가 동방 교회의 일을 자신의 이름으로 처리하게 되면 로마 교회에서 크게 반발하였고 수위권도 없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주교가 그럴 권리가 없음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동서교회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이질감이 심화된 데다가 여러 세계 공의회를 거치면서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의 입지가 비잔티움 황제와 결속하여 급속히 높아졌고, 게다가 6세기 중반 이후 유스티니아노스 대제 사후에는 게르만족 중 하나인 랑고바르드족(Langobard)4이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반도 전체를 들쑤셔 놓았기 때문에 로마 교황이 동방 교회의 일에 왈가왈부를 할 여력이 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등에 업고 요안네스 4세는 로마의 입김 없이 이 모든 일을 자력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이 때 그가 공식 문서에서 사용한 직함이 바로 세계총대주교(世界總大主敎)였다.
사실 세계총대주교라는 직함을 처음 쓴 사람은 요안네스 4세가 아니다. 이미 이 직함은 아카키오스 분열 당시에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에 의해 간간이 사용된 전력이 있다. 그러나 세계총대주교라는 직함이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에 의해 공식적으로 빈번히 사용된다는 것을 로마 교회에서 분명히 인식하게 된 것이 바로 요안네스 4세 때의 일이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펠라지오 2세(Pelagius II: 579-590)는 이 직함에 상당한 거부감을 피력하였고, 콘스탄티누폴리스에 가 있는 교황 칙사가 요안네스 4세와 통교(通交)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하지만 요안네스 4세는 이 직함을 포기하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1,5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세계 정교회 신자들의 영적 우두머리인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의 직함에는 세계총대주교라는 단어가 자리 잡게 되었다.5 왜 요안네스 4세는 총대주교 직함 앞에 ‘세계의(οικουμενικός)’라는 형용사를 붙여 괜히 로마 교회와의 충돌을 자초했을까?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들은 ‘전세계의 군주’라는 뜻의 ‘데스포테스 테스 오이쿠메네스(Δεσπότες της Οικοθμένης)’라고 불리었다. 세속 군주가 전세계의 군주라고 불리었으므로 영적인 우두머리인 비잔티움 제국의 총대주교 역시 유사한 명칭을 갖게끔 불리어지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는 거대한 전제 황권의 재가와 견제를 받는 위치에 있기는 했으나 종교적으로는 황제보다도 고귀하고 거룩한 위치에 있다고 인식되었으므로 질적으로는 유사한 직함을 갖는 것이 온당하다고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제와 같은 도시에 착좌하는 총대주교 역시 ‘전세계의 총대주교’라는 뜻의 ‘오이쿠메니코이 파트리아케스(Οικουμενικοί Πατριάχες)’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 교황으로서는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의 세계총대주교 직함 사용을 좌시할 수 없었다. 이는 전 교회에 대해 수위권을 가지는 어머니 교회인 로마 교회의 우두머리인 교황을 중심으로 한 위계 질서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이미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와 비잔티움 황제에 의해 받을대로 받은 상처가 여전히 뼈아픈 상태였으므로 이에 대해 극렬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펠라지오 2세는 앞서 언급했듯 바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펠라지오 2세는 요안네스 4세를 제대로 상대하기도 전에 590년 홍수로 인해 로마에 돌게 된 전염병 때문에 곧 선종하고 만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8편의 서방교회 중심 인물인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Gregorius I: 590-604)가 등장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할 때의 그 그레고리오가 맞다. 동방의 요안네스 4세를 맞설만한 서방 교회의 걸출한 인물이 이 때 나타난 것이다. 그레고리오 1세는 전임 펠라지오 2세의 교황 재위 시절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칙사로서 체류해 있었으므로 요안네스 4세와 잘 알고 지냈던 듯 하다. 때문에 그의 재위 초반에는 요안네스 4세에 우호적으로 접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593년에 결국 그의 태도를 급변하게 만드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 당시 요안네스 4세는 사제 둘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징계하려고 하였다. 사제들은 교황에서 이 일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그레고리오 1세는 요안네스 4세에게 서한을 보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듣고자 하였다. 요안네스 4세는 사정을 소상히 적어 교황에게 답신을 보냈다. 그런데 요안네스가 그레고리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거의 모든 줄에 세계총대주교라는 직함이 쓰여 있었다! 그레고리오는 요안네스에게 이에 대해 질책하고 항의하는 무척 긴 답신을 보냈고, 요안네스 뿐 아니라 당시 황제였던 마우리키오스(Μαυρίκιος)와 황후 콘스탄티나(Κωνσταντίνα) 및 다른 사람들에게도 편지를 보내 세계총대주교 직함 사용의 부당함을 알리려 했다.
그레고리오 1세가 괜히 ‘대교황’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이 아니다. 로마 교황 역사상 ‘대교황’이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이 딱 둘인데 그 중 한 명은 이미 앞 편에서 무수히 나왔고 이제도 나올 대교황 레오 1세(Leo I: 440-461)이며 다른 하나가 바로 이 그레고리오 1세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 중 하나는 교회에 대한 아주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는 것인데 즉 세계 교회에 대한 로마 교회의 우월성과 정통성, 교황의 수위권을 강조하는 데 헌신했다는 점이다. 그레고리오 1세는 표면적으로는 전세계에 다섯 개의 총대주교좌가 있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사도 베드로와 관련된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만이 진정한 총대주교좌라고 생각했다.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좌야 그 도시의 역사적 의미상 인정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사도좌에 대한 전설도 불분명한 콘스탄티누폴리스가 단지 제국의 수도라는 이유 하나로 총대주교좌의 위치를, 게다가 세계총대주교좌라는 오만한 이름을 가지는 것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하는 것이 바로 그레고리오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레고리오 1세는 원래 세계총대주교라는 직함은 칼케돈 공의회 때 대교황 레오 1세에게 바쳐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칼케돈 공의회에 모인 모든 주교들은 당시 단성론을 공박하고 정통 신앙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레오 1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전세계의 주교’라는 뜻의 '우니베르살리스 에피스코푸스(Universalis Episcopus)'라는 직함을 바쳤지만, 정작 레오 1세는 다른 총대주교와 주교들을 사유화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며 거절했다. 실제로 칼케돈 공의회 내용을 담은 문서에서 레오 1세의 직함은 그리스어로 '아르키에피스코포스 테스 메갈레스 카이 프레스비테라스 로메스(Αρχιεπίσκοπος της Μεγάλες και Πρεσβυτέρας Ρώμης: 위대한 대주교이자 로마의 사제)'였다. 전임 교황이 보여 준 겸양의 자세를 본받겠노라고 천명한 그레고리오 1세는 교황인 자신의 직함을 스스로 표기해야 할 때에는 '천주의 종의 종'이라는 뜻의 '세르부스 세르보룸 데이(Servus Servorum Dei)'라고 썼으며 이것은 현재 교황인 프란치스코(Franciscus, 2013-현재)까지 지켜진 교황의 자칭 직함이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요안네스 4세는 세계총대주교라는 직함을 포기하지 않았고 굳건히 써 나갔다. 결국 6세기 후반부는 유력한 두 주교, 곧 로마의 주교인 '천주의 종의 종'과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주교인 '세계총대주교'가 자기가 자신을 부르는 이름을 놓고 격돌했던 것이었다.
이 분쟁은 아카키오스 분열과 같은 심각한 교회 분열을 야기한 사건은 아니지만 분쟁 자체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먼저 이 직함을 둘러싼 논쟁 자체가 유스티니아노스 대제 사후에 잠시 주춤했던 교황의 수위권 주장과 이를 계기로 급성장한 콘스탄티누폴리스 세계총대주교의 영향력 행사 사이에 벌어진 충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적어도 세계총대주교라는 직함의 사용 역사가 수십년이 되었음에도 6세기 말에 와서야 논란이 불거진 것은 이러한 직함을 참칭하는 것을 로마 교회가 인식할 정도로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의 힘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여기에 대해 파문이나 소환 대신 항의와 질책 수준밖에 대응하지 못한 로마 교회의 반응으로 미뤄보아 동방 교회에 대한 로마 교회의 영향력이 지난 수십년을 거치면서 크게 약화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이 분쟁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종교적, 정치적으로 분리된 것을 넘어서 이제는 문화적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실 그리스어로 ‘세계의’에 해당하는 단어인 ‘오이쿠메니코스(οικουμενικός)’라는 단어에 대응하는 라틴어 번역어는 ‘우니웨르살리스(universalis)’인데, 15세기 이후 라틴어에도 차용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오이쿠메니쿠스(oecumenicus)’와는 어감이 사뭇 다르다. 잘 안 와 닿는다면 영어 단어, 즉 전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인 universal과 후자에 해당하는 ecumenical을 비교해 보라. 전자는 뭔가 세계를 넘어 온 우주, 즉 신이 창조한 만물을 상징하는 느낌이 들지만 후자는 단지 세상 여러 나라를 뜻하는 느낌이 든다. 그리스어의 οικουμενικός는 비록 universal의 어감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비교적 세속적인 나라,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그들의 중심이자 전부인 비잔티움 제국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했다.8 즉 야만인의 나라에 대비되는 말로써 그리스의 문명화 된 땅을 의미하는 단어가 ‘오이쿠메네스 코라(οικουμενης χώρα)’였다. 이런 뜻에서 비춰본다면 οικουμενικός는 ecumenical이라는 뜻보다는 imperial이라는 뜻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실제로 세계총대주교라는 직함을 썼던 요안네스 4세 및 그 이후의 대부분의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들은 전 세계에 대한 수위권이나 우월성 등을 강조한 바가 없고, 단지 비잔티움 제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남아 있는 영토 내의 동방 교회에 대해 수장 행세를 하는 수준이었다. 설사 우위를 주장했다 하더라도 전 세계의 가톨릭 교회 위에 있는 교황의 수위권 주장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페르디난드 카텐부쉬(Ferdinand Kattenbusch)와 같은 독일 신학자는 세계총대주교라는 직함을 Ökumenisches Patriarch으로 번역하지 말고 Reichspatriarch로 번역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것을 영어로 하면 Imperial Patriarch, 즉 제국의 총대주교라는 뜻의 축소된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즉, οικουμενικός가 나타내는 뜻이 전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 그것도 제국의 주인인 황제와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결국 이것은 언어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애초에 그리스어는 사변적이고 여러 해석의 여지가 다분히 있는 언어이다. 이에 비해 라틴어는 명확하고 한정적인 의미를 자랑하는 언어였다. 그레고리오 1세가 οικουμενικός의 의미와 어감을 제대로 이해했거나 혹은 이해하려 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라틴어로 번역된 편지에서 발견한 universalis라는 단어에 격한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그리스어, 그리고 그 용례에 대한 무지만큼이나 멀어진 그리스어권 비잔티움 제국 문화와 라틴어권 이탈리아 반도 문화의 괴리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동방의 총대주교좌 넷 중 콘스탄티누폴리스만이 세계총대주교라는 추가 직함을 달고 이것을 참칭하는 것에 대해 로마 교황은 대대로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비록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가 로마에 보내는 서한에서 스스로를 세계총대주교라고 칭하는 예는 그 이후로 별로 없었고, 심지어 아카키오스 분열 이후 가장 큰 분열을 야기시킨 포티오스 1세(Φώτιος Α': 858-867, 877-886)도 세계총대주교 직함을 로마 교회 앞에서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직함은 훗날 동서교회 대분열의 정점을 찍었던 미하일 1세(Μιχαήλ Α': 1043-1059) 때 빈번히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4차 십자군 전쟁 이후 서로 돌이킬 수 없는 교회 분열의 막장을 달리던 13세기 초 니케아로 피신하여 명맥을 유지하던 당시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 예르마노스 2세(Γερμανός Β΄: 1223-1240)부터는 아예 확정적으로 공식적인 대내 및 대외적 직함이 되어 항상 빈번하게 쓰이게 되었다.
그런데 대교황 레오 1세는 과연 그레고리오 1세가 주장했듯이 칼케돈 공의회 때 자신에게 바쳐진 세계총대주교의 직함을 거절한 것일까? 이것이 낭설에 불과하다는 것이 19세기 로마 가톨릭 주교이자 신학자인 카를 요세프 폰 헤펠레(Karl Josef von Hefele)가 쓴 저서 ‘공의회의 역사(Conciliengeschichte)’에서 밝혀지게 되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비록 레오 1세는 ‘전세계의 주교(univeralis episcopus)’라는 직함은 쓰지 않았지만 서방 교회의 주교들에게 자신이 보낸 서한에서는 그 이상의 직함도 사용하고 있음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갈리아 지방의 주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레오 1세가 자기 자신을 'Sanctus et beatissimus Papa, caput universalis ecclesiae, Leo.'라고 표현했는데 이를 번역하면 ‘거룩하고 가장 축복받은 교황, 곧 전세계교회의 수장, 레오’이다. 또한 칼케돈 공의회에 교황 특사로 파견된 주교들은 본인들을 'της οικουμενικής εκκλησίας έπισκόπου'라고 표현했는데 이를 번역하면 ‘전세계교회의 주교의’ 특사였다. 더욱이 이들이 쓴 라틴어는 'Vicarii apostolici universalis ecclesiae papae'인데 이 말의 뜻은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세계교회의 교황의 대리자들'이다. 결국 레오 1세가 세계총대주교의 직함을 거절했다는 그레고리오 1세의 주장은 명백한 오류였던 것이다. 오히려 레오 1세는 세계'총대주교'가 아닌 세계'교황'으로 불리길 원했던 것으로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