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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2-6
Religion 2-6
동서교회 대분열 6
History of Schism between the East and West Churches 6
성상파괴론의 등장
Iconoclasm
비잔티움 제국은 7세기 초엽에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전임 황제인 마우리키오스(Μαυρίκιος)를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포카스(Φωκάς)는 제위 찬탈을 벌하겠다는 명분을 내건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략을 받게 된다. 무능하고 잔인하기만 했던 포카스의 집권 아래 608년에는 칼케돈이, 614년에는 예루살렘이, 그리고 618년에는 이집트가 페르시아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은 이미 수백년간 전쟁을 지속하고 있었으나 이 때만큼 페르시아에게 유리하게 전황이 흘러간 적이 없었으며, 당시 페르시아 황제인 호스로 2세(خسرو پرویز)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사상 최대 영토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풍전등화와 같은 제국의 운명을 수렁에서 구해낸 영웅은 포카스를 살해하고 황제가 된 이라클리오스(Ηράκλειος)였다. 그는 오랜 비잔티움-페르시아 전쟁을 끝내고 전임 황제가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그가 페르시아군에게 빼앗긴 성 십자가를 되찾아 콘스탄티누폴리스로 개선하는 장면은 7세기 콘스탄티누폴리스의 가장 영광스런 장면으로 기억되었다.
그런데 이 전쟁 중에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일어난다. 때는 626년, 페르시아군이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포위한 때이다. 당시 페르시아는 비잔티움 제국을 괴롭히고 있던 아바르족, 슬라브인들과 협공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대군의 포위 앞에서 콘스탄티누폴리스는 위기에 처했지만 워낙 잘 설계된 천혜의 난공불락 요새도시였던지라 (비잔티움 제국 입장에서) 이교도들과 야만인들에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당시, 7세기 비잔티움 제국과 페르시아의 전쟁은 정치군사적인 전쟁의 성격에서 그치지 않았고 점차 종교적인 성전(聖戰)의 양상을 띠었는데, 특히 예루살렘에서 페르시아군에 의해 자행된 약탈과 학살이 이러한 현상을 부추켰다. 성직자들도 제국에 협조하여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특히 당시 세계총대주교였던 세르기오스 1세(Σέργιοος Α': 610-638)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聖畵)를 들고 시가행진을 벌여 제국군과 시민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성화에 담긴 신령한 하늘의 뜻이 임해서였을까? 콘스탄티누폴리스 공격을 위해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보낸 연합군의 함대가 원인 모를 갑작스런 폭풍에 좌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안 그래도 보급이 시원치 않은데다가 공성전이 낯선 유목민족 아바르족의 전의를 완전히 꺾어놓았고, 페르시아군의 사기 저하에도 한 몫 단단히 했다. 결국 페르시아-아바르 연합군은 포위를 풀고 철군했으며 콘스탄티누폴리스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폴리스 시민들은 모두 환호했으며 제국의 수도를 지켜준 테오토코스(하나님의 어머니, 즉 성모 마리아)를 찬양했다. 이 때의 기적을 기리고 성모 마리아를 높이기 위해 동방 정교회에서는 전례가 행해지는 시간 내내 일어서서 성모를 찬양하는 아카티스토스(Ακάθιστος), 즉 성모기립찬양에 '티 이페르마호 스트라티고 타 니키티리아(τη υπερμάχω στρατηγώ τα νικητήρια: 우리를 지키시는 승리의 대장이신 성모님께)'를 삽입하여 반복해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비잔틴 전례가 아니고 바로 세계총대주교가 가지고 나왔다는 그 형상, 곧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다. 도대체 이 그림이 어찌해서 정교회의 수장이자 제국 교회의 가장 큰 어른 중 하나인 세계총대주교의 손에 들릴 수 있었을까? 그 그림에는 정말 신령한 힘이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정교회에서는 허용되었던 사상이었을까?
구약성경의 출애굽기(탈출기) 20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개역개정판)
이 말은 신의 형상을 인간의 기교로 그리거나 새기지 말 것을 의미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것을 향한 우상숭배가 횡행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뒤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신과 대면하는 동안 자신들을 이끌어 줄 수장이 깜깜 무소식인 것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인 나머지, 금붙이를 녹여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그것을 야훼로 여겨 경배하다가 큰 화를 당하게 되었다. 신의 형상을 따라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하는 이러한 법칙은 당시 팔레스타인 가나안 지방에 거주하던 다른 민족의 문화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는데, 초기 기독교는 이러한 유대교적 풍습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했다. 즉, 이러한 일련의 성경 에피소드가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기독교의 신과 신의 아들이자 또다른 위격의 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일련의 행위는 모두 죄악이었다. 게다가 콘스탄티노스 대제의 기독교 용인 정책 이전에는 기독교인들이 모두 심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 그림과 조각을 소유하거나 제작한다는 것 자체가 '나 죽여주십시오'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지하묘지의 암울한 곳에서 비밀스럽게 예배해야 했던 초기 기독교도들은 박해하는 로마 관리들이 알아볼 수 없는 비밀스런 형상을 지니면서 서로 교인임을 확인하였는데, 사용된 형상 중 대표적인 것은 물고기(그리스어로 이크티스, ἰχθύς)였다.2
그러나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이후 자유롭게 종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다소 비밀스럽고 제약이 많았던 초기 기독교의 모습이 점차 사라져갔다. 대신 인류의 기본적인 욕구, 즉 심미와 예술에 대한 본능적 욕구가 종교에 녹아들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제국의 중심지가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옮겨진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누구인가? 신을 인간처럼 묘사한 사람들이 아닌가. 점차 민간 신앙과 타 종교의 인간 이미지가 차용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 등의 형상을 세속적인 물질로 그리거나 빚는 것은 공식적으로 여전히 죄악시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신(新)플라톤주의의 주장과도 어느 정도 일치하는 사고이기도 했다. 저급한 지상의 것으로 천상의 지고한 것을 표현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일 그러한 이미지가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닌 천상의 것으로 그려진 것이라면 어떨까? 그것은 죄악에 물든 피조물의 창작물이 아니므로 그 형상 자체로 영험한 성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러한 이미지가 세상에 등장했으니 소위 에데사(Έδεσσα)의 그림, 만딜리온(μανδηλιον)이라 불리는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천 조각이었다. 만딜리온에 관하여 동방 정교회에서 받아들인 최종적인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예수가 젖은 얼굴을 천에 찍었을 때의 문양이 남아 그림으로 나타났으며 이것이 사도 다대오(유다 타대오)를 통해 전달받은 에데사의 왕 아브가로스(Ἄβγαρος)가 한센병으로부터 치유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신령한 힘에 의해 그려진 그림에 신비한 힘이 있다는 주장은 옛날부터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미신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을 텐데, 이것이 기독교와 결합하게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영험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7세기에 이르러 전쟁 중에 세계총대주교가 성화를 들고 시가행진을 했다는 것은 이미 일반 민중 사이에서 성화와 성상에 대한 숭배가 보편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서방 교회는 적극적으로 성화와 성상(聖像)을 전례예 사용했고 특히 서로마 제국 몰락 이후 서유럽의 주인이 된 게르만족에 포교할 때 이런 성화상들은 아주 유용한 도구였다. 성화와 성상은 사변적이기만 한 교리보다 더 가시적인 형체였기 때문에 이교도들과 야만인들에 대한 전도에 효과적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성화와 성상에 대한 숭배 혹은 공경 의식은 새로운 위협 앞에서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된다. 상처뿐인 비잔티움-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새로운 세력이 밀물 밀어닥치듯 비잔티움 영토에 밀려들어온 것이다.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온 그들은 '알라'라고 부르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무함마드(مُحَمَّد)를 최고의 선지자로 받든 그들은 바로 무슬림(مسلم), 즉 이슬람교도였다. 무함마드 사후 지도자에 해당하는 칼리파(خليفة)들의 영도에 따라 그들은 아라비아 반도를 일통한 뒤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사산조 페르시아를 쉽게 접수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은 무섭게도 빠른 무슬림들의 진군 앞에 7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직전에 가까스로 탈환한 동방 지역을 모두 새로운 맹주에게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고대 총대주교좌인 예루살렘(637), 안티오키아(637), 그리고 알렉산드리아(640)가 모두 아랍인들의 손에 떨어졌다. 펜타르키아가 무너진 것이다! 비록 이슬람 제국이 타 종교,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에 관용을 베풀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차별과 멸시, 학대가 있었으니 그 압제 하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은 심히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세 총대주교좌의 영향력이 상실된 이 때부터 기독교 세계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로마 가톨릭)와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동방 교회(=동방 정교회)를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더 이상 펜타르키아가 아닌 이두 체제, 곧 디아르키아(διαρχια)가 되었다.
이슬람교의 발흥은 유럽 기독교 사회에 거대한 충격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랍인들 역시 한낱 이교도에 불과하며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이민족 중 하나라고 얕잡아 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위협했던 그 모든 이교도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그들은 무서운 속도로 중동 지역을 장악하더니 이내 키프로스 섬과 북아프리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7세기 말에는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포위할 정도로 그 위세가 무시무시해졌다. 이들이 단순한 도적 잡떼가 아님을 확신하게 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제국의 몰락이 자신들의 죄과로 인해 받게 된 신의 징벌이며, 신이 사용한 채찍이 곧 무슬림이라는 사고가 싹트기 시작했다.
아마도 비잔티움 제국 입장에서는 도대체 이 새로 등장한 적이 어떤 자들인지 알고 싶어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지리적인 근접성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 제국 사이에서는 왕래도 잦았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문화적인 교류가 이뤄지면서 서로를 비교 및 대조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가장 비슷했고 무엇이 가장 달랐을까? 이슬람교의 가르침은 기독교 및 유대교의 가르침과 일신교라는 점에서는 매우 비슷했다. 그러나 세부적인 것들은 많이 달랐다. 그런데 가장 눈에 띠게 달랐던 점이 바로 '이미지'였다. 이슬람교의 경전 중 하나인 '하디스(حديث نبوي)'에서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것을 금지하는데, 이로 인해 생명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 뿐 아니라 동물들까지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은 금기가 되었다. 선지자인 무함마드는 물론이요, 형체도 없으신 유일신 알라를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 자체도 금지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행위가 우상숭배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서양화법이 이슬람 세계에 도입된 이후에도 마호메트나 칼리파의 얼굴들은 모두 하얗게 칠해지거나 베일에 쌓인 채로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르침에 철저했던 무슬림들의 눈에는 기독교도들의 성화, 성상이 혐오스럽게 보였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멸시와 조롱의 대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기독교 사회가 패퇴를 거듭하고 몰락하는 대신 이슬람교가 부흥하는 것은 그들이 유일신의 가르침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며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모른 채 성화와 성상으로 대표되는 우상 숭배에 몰두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두루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비잔티움 제국 내에도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고, 위정자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왜 신께서 자신들을 버리고 이교도들을 성장하게 하셨는가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슬람교도들의 생활과 문화를 눈앞에서 목도하던 지금의 소아시아 지방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에 특별히 더 공감을 표했을 것이다. 마침내 주로 소아시아 기독교 사회 안에서도 이슬람교도들처럼 기독교 내에 존재하는 성화와 성상을 모두 없애고 그런 것들을 숭배하는 풍습을 근절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움직임을 성상파괴운동(iconoclasm)이라고 한다.6하지만 성상파괴운동이 무조건 이슬람 제국의 발흥의 영향으로 벌어진 것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1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 기독교의 구조는 로마 제국의 수직적인 행정 구조를 본딴 것이기 때문에 위계질서가 잘 잡혀 있는 형태였다. 주교와 사제, 그리고 부제는 각자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이 있었고, 성직을 맡지 않은 평신도들은 이들 성직을 맡은 자들로부터 성사를 받고 그들의 지침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여 구원에 이를 것을 요구받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소통이 이들 성스러운 물건들을 매개로 하여 가능하다고 하는 믿음이 점차 생겨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들 물건들이 구원에 대한 믿음과 성인들의 통공 및 전구를 보다 확실하게 체험해준다는 의미에서 매우 긍정적인 신앙의 도구들이었고 성직자들도 성물들을 공경해 왔다. 그러나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성화와 성상들 자체에 신비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 미신처럼 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제국이 관리를 하고 있는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이어나가기보다는 성화와 성상을 통한 중재에 더 열심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특히 이들 물건들이 많이 수집되었고 또 보존해 나가던 수도원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었는데 신앙심을 가진 젊은이들이 공적인 교회에서 활동하기보다 신비한 것들이 더 가득한 수도원에 몰리는 기현상이 발생했게 되었다. 덩달아 수도원의 부는 점차 축적되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지역에 끼치는 영향력이 대중들 사이에서 커져만 갔다.
교회 입장에서는 한낱 그림과 조각상들에 의해 자신들의 권위가 크게 훼손되는 것을 목도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들 또한 성화와 성상을 공경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경이 숭배 이상으로 흘러가 버린다면 교회가 지상에서 존재할 이유가 사라지게 되었다. 모든 이들이 각자 집에 성물을 모셔놓고 신과 직접 소통한다면 교회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은 큰 위기였다. 동방 교회나 서방 교회는 모두 구원은 개인의 깨달음이 아닌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오며 오직 이것만이 참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공적 교회 활동을 그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심각한 위기 상황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활발한 경제활동으로 국가의 부를 창출해야 할 젊은이들을 성화와 성상 숭배의 도가니에 방치해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처사였다. 부는 더 이상 국내 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은밀한 수도원 창고에 쌓이고 있었으니 이는 교회 및 국가의 재정과도 관련된 일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이러한 교회의 위기를 잘 관리해야할 책무를 느꼈으며, 이것이 성상파괴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또한 성상파괴운동의 이면에는 기독론(Christology)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나중에 자세하게 소개되겠지만 성상파괴운동을 벌인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Κωνσταντίνος Ε΄)는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로 그림이나 조각으로 묘사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로 성화나 성상이 예수의 인격적인 면밖에 나타낼 수 없다는 점을 제시했다. 칼케돈 정통신앙에서 채택한 ‘인격과 신격이 구분되지 않고 동일한 위격 안에 함께 있는’ 예수의 속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이단적이고 무의미한 존재라고 여겼던 것이다. 만일 성화나 성상이 예수의 인격만 묘사하는 것으로 제작되었다면 이것은 네스토리오스(Νεστόριος: 428-431)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고, 설사 인격과 신격을 모두 묘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도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한 면 뿐이니 단성론자들의 주장을 따르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신격을 어떻게 성화나 성상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느냐, 그것이 성화상과 관련된 기독론 논쟁의 핵심이었다.
마지막으로 비잔티움 제국 내 지역 및 정권 분쟁도 성상파괴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이슬람 제국의 침입 뿐 아니라 발칸 반도를 침략한 불가르족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는 급속도로 축소되었고 성상파괴운동을 최초로 벌인 레온 3세(Λέον Γ’) 재위 당시 제국의 판도는 대부분이 소아시아 지방이었고 콘스탄티누폴리스와 발칸반도의 몇몇 지역,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에 몇몇 영토가 전부였다. 당시 성상파괴를 지지한 사람들은 대체로 소아시아 지역 사람이었고 ㅡ 레온 3세 역시 소아시아의 게르마니키아(Γερμανίκεια) 사람이었다. ㅡ 이에 반대한 사람들은 대체로 유럽 대륙, 특히 그리스 지역 사람들이었다. 성상파괴를 지지한 사람들은 주로 황제와 소수의 열심 있는 성직자였으나 성상 공경을 지지한 사람들은 귀족층, 수도원, 그리고 일반 대중이었다. 때문에 황제가 누구였냐, 섭정이 어떤 편이냐에 따라 제국의 성상파괴 관련 정책은 번복되기 일쑤였고 9세기경에는 황제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성상파괴운동을 이용하기까지 하였다.
가장 먼저 성상파괴운동의 기치를 내건 비잔티움 황제는 레온 3세(Λέων Γ')였다. 그는 이전에도 성상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곤 했지만 본격적으로 성상파괴정책을 실시하게 된 것은 726년으로, 그 계기는 다름 아닌 화산폭발에 있었다. 3600여년전에 크리티(Κρήτη) 섬에서 꽃피운 미노아 문명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바 있는 티라(Θήρα) 화산섬이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726년의 화산폭발로 인해 소아시아 지역은 화산재로 뒤덮였고 아마도 강력한 쓰나미가 연안에 상륙하여 수많은 인명, 재산 피해가 났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레온 3세는 이 거대한 자연 재해를 신의 분노로 여겼는데, 신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죄악의 근원을 성상을 향한 숭배에서 찾았다. 당시 콘스탄티누폴리스 왕궁 입구에 있는 할키(Χαλκή) 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화가 있었 는데 레온 3세는 당장 이를 철거하고 십자가를 대신 세울 것을 명령하였다. 성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던 사람들은 갑작스런 황제의 결정에 반발하였고, 이 과정에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성화를 철거하려던 사관이 목숨을 잃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레온 3세는 이때부터 줄곧 여러 칙령들을 내려 동방 교회에서 행해지던 성상에 대한 숭배 행위를 공박하였다. 당시로서는 소수였지만 몇몇 유력한 고위 관료들과 주교들은 이에 동조하기 시작했고, 그 이전부터 성상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 특히 소아시아 지역 사람들의 의견도 덩달아 커지기 시작했다. 성상을 숭배 혹은 공경하는 전통이 기독교의 고유한 전통이며 유대교도들과 무슬림들로부터 기독교인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세계총대주교 예르마노스 1세(Γερμανός Α': 715-730)는 황제의 정책이 제국에 괜한 분란을 조장한다고 생각하여 깊이 우려했지만 황제의 뜻은 어느 때보다도 확고했다. 당시 성상파괴론자로 명망이 높았던 나콜리아(Νακώλεια)의 주교 콘스탄티노스(Κωνσταντίνος)마저 토론을 통해 굴복시킬 수 없었던 예르마노스였으나 그도 세속의 전제 황제를 이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가 730년 황제의 칙령에 서명하지 않게 되면서 세계총대주교는 좀 더 성상파괴정책에 협조적이었던 아나스타시오스(Αναστάσιος: 730-754)로 교체되었다.
서방교회 사람들은 황제의 정책이 굉장히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오 2세(Gregorius II: 715-731)는 레온 3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낼 정도였다:
황제께서 보내신 대사 루피누스(Ruffinus)로부터 당신의 편지를 전해 받았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저지른 오류를 고수하고 있다는 것에 큰 슬픔을 느낍니다… (중략) … 당신은 당신의 변덕스러운 영혼을 따랐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황실의 정치적 상황이 당신을 정도에서 벗어나게 만들도록 허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나는 황제이자 주교다"라고 말했지만 당신 이전의 콘스탄티노스 대제, 테오도시오스 대제, 발렌티아노스 대제, 그리고 여섯 번째 주교회의에 참석하셨던 유스티니아노스 황제의 아버지인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모두 진리를 따름으로써, 교회를 세우고 키움으로써, 또한 교황과 같은 믿음을 향한 열정을 보임으로써 자신들이 황제이자 주교임을 증명했습니다. 황제이자 사제임을 주장한 그들은 모두 그들의 행실로 그것을 증명했는데, 당신은 재위 초반부터 교부들의 신조를 살피는 것조차 계속 실패하고 있습니다… (중략) …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돌과 목재, 짚과 회반죽, 그리고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 아닙니까? 하지만 교회는 그림들과 성인들의 기적, 그리스도와 성모님, 그리고 성인들과 사도들의 고난을 표현하는 것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성화상에 그들의 부를 지출합니다. 게다가 성인 남녀 모두 이러한 그림들을 자신들의 어린이들과 젊은이들, 그리고 이교도 국가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합니다. 이는 이 그림들을 통해 사람들이 신에게 마음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그림들을 삼가라고 하면서 별 효과가 없는 설교와 사소한 일들, 파이프와 지터 음악, 장난감들로 만족하라고 합니다… (중략) … 빵과 물에 대해서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 얘기된 적은 없었습니다만 인류의 시작 때부터 받아들여졌던 것들입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성화상 역시 받아들여져야 할 것들입니다. 교황이 성화상들을 모셔왔고, 또 그 어느 기독교인들도 이 성화 없이 여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성화상이 선하기 때문이며 신이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략)
단지 성직자들만이 분노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유스티니아노스 1세(Ιουστινιανός Α') 사후 랑고바르드족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제국의 통치력은 이 지역의 중심지인 라벤나(Ravenna)를 비롯한 반도의 연안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게다가 서방 세계 사람들에게는 콘스탄티누폴리스로 떠나간 옛 로마인들이 보낸 그리스인 총독보다는 로마에서 정신적인 수장 역할을 계속 해 온 교황에게 깊은 충성을 보였고, 교황은 종교적인 이유로 또는 정치적인 이유로 비잔티움 제국이 임명한 라벤나 총독과 대립하곤 했다. 실제로 722년에 비잔티움 제국 정부는 아랍인들과의 전쟁비용을 확보하기 위해 로마의 세율을 올리기로 결정했는데 그레고리오 2세는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증세를 거부했다. 옛날같았으면 황제가 총독을 시켜 군대를 동원, 교황을 체포한 뒤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소환하여 으름장을 놓았을텐데 8세기의 비잔티움은 예전의 비잔티움이 아니었다. 이탈리아 반도 내부에서 엄연히 영향력을 행사하던 랑고바르드족의 존재 때문에 함부로 거병(擧兵)할 수 없었고, 결국 황제는 증세 결의를 철회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방 사람들의 오랜 전통과 믿음에서 어긋나는 성상파괴정책의 강요는 안 그래도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비잔티움 황제에 대한 그나마도 없는 신뢰를 거둬들이는 것은 물론, 이탈리아 반도 사람들로 하여금 이참에 그로부터 독립해버리겠단 의지를 부추기게 하는 일이었다.
결국 총독령의 수도인 라벤나의 군대가 폭동을 일으켰고, 아드리아 해 연안의 다섯 도시를 관장하는 펜타폴리스(Πεντάπολις)의 공작이 이에 동조하였다. 폭동은 삽시간에 총독령을 휩쓸었고, 황제의 뜻을 따르고자 했던 당시 라벤나 총독 파블로스(Παύλος)가 이 혼란의 와중에 죽게 된다. 하지만 레온 3세는 이 충격적인 상황에도 성상파괴정책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것은 제국의 일관적인 종교정책으로 자리하게 된다.
성상파괴정책이 절정에 이르렀던 때는 레온 3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Κωνστατίνος Ε') 집권 시기였다. 콘스탄티노스 5세는 보다 조직적으로 강력하게 성상 숭배자들을 박해하였는데 그의 재위 기간에 이로 인해 목숨을 잃는 수도사들과 평신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또한 많은 수도원들이 혁파되거나 몰수를 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훗날 콘스탄티노스의 무덤은 파헤쳐졌고, 그는 코프로니모스(Κοπρώνυμος, 우리 말로 번역하면 똥쟁이)라는 별명으로 경멸적으로 불렸다.10 제국의 황제가 그렇게 불리며 모욕을 당할 정도로 그는 성상 공경론자들로부터 지독한 비난과 저항을 받았는데 이는 그만큼 그가 아주 독실한 성상파괴론자였다는 것을 입증한다. 도대체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열렬한 성상파괴정책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아랍과의 전쟁을 위해 콘스탄티노스가 자리를 비운 741년의 어느날, 콘스탄티노스의 매형이 되는 아르타바스도스(Αρτάβασδος)는 반란을 일으켜 황제의 자리를 빼앗는 사건이 발생한다. 비록 3년여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르타바스도스는 자신의 반란을 정당화하기 위해 전임 황제였던 레온 3세가 펼쳤던 성상파괴정책을 모두 백지화하고 성상을 옹호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펼쳤다. 이는 제국 내에서 레온 3세의 성상파괴정책을 부정하는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황제의 자리를 되찾아야 할 콘스탄티노스 5세로서는 성상 옹호론은 철저하게 뭉개버려야 할 자신의 적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노스는 자신의 지지기반인 소아시아의 아모리오(Αμόριο)에서 세력을 키우며 권좌를 되찾기 위한 복수의 칼날을 갈았고, 결국 743년 제위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뼈아픈 경험을 가진 콘스탄티노스가 성상파괴정책을 자기 아버지보다도 더 강하게 밀어붙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콘스탄티노스의 성상 정책은 아버지 레온 3세가 행했던 정치적인 수준에서만 머물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신학적인 고찰을 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레온 3세 시기의 성상파괴정책에도 종교적인 밑바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우상 숭배 금지 명령이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 5세의 생각은 그것보다 더 진일보한 것이었다. 그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즉, 어떤 형상이라함은 그것의 원형질과 동일한 질료의 것이어야 하는데, 세상의 그 어떤 물질도 신격과 인격을 동시에 가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질료의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론에 근거한 콘스탄티노스 5세의 생각은 꽤 엄격했고, 곧 그리스도의 참된 형상은 오직 성만찬 때 주어지는 떡과 포도주뿐,13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의 생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성 이리니(Αγια Ειρήνη) 성당이다. 740년에 일어난 끔찍한 지진으로 인해 무너진 이 성당을 재건하는데 공을 들인 콘스탄티노스는 성당 입구에 거대한 황금십자가 모자이크만을 새겨놓았다. 보통의 비잔틴 양식에 따르면 성당 입구에는 전능자 그리스도 혹은 성모의 형상을 그린 모자이크화가 있는데 성상무용론을 주장한 콘스탄티노스에게 그런 그림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 기하학적이지만 가장 기독교적인, 정말 단순해 보이는 십자가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제 황제는 성상과 관련된 자신의 뜻을 종교 회의에서 관철시켜 공식적인 교의(敎義)로 삼기로 결심했다. 754년 이에리아(Ιερια)에서 주교 회의가 소집되었고 여기서 콘스탄티노스 5세의 뜻대로 성상을 파괴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합당하다는 결론이 채택되었다. 일곱번째 세계공의회로 자칭 공포된 이 주교 회의의 결론은 서방 교회는 물론 동방 교회 주교들 모두로부터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여기에 모였던 338명의 주교들이 모두 콘스탄티누폴리스 근처의 동방교회 주교들 뿐이었다. 서방 교회의 주교들뿐 아니라 다른 총대주교좌, 즉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주교들은 초청받지도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아나스타시오스는 주교 회의가 소집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에리아 공의회는 총대주교 혹은 그들의 대사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모두 성상파괴론을 지지하는 주교들만 모여 결론을 내린 회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회의에 대한 진정성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았고 적법하지 않다고 본 동서방의 많은 교회가 이 공의회의 결론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에리아 공의회 이후 기세등등해진 콘스탄티노스 5세의 성상파괴정책은 맹렬해지다 못해 과열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스는 특히 성상 숭배의 중심지였던 수도원을 심각하게 박해하였는데 당시 목숨을 잃거나 제국 밖으로 도망친 수도사들과 성상 숭배자들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수도원이 소유한 토지와 재산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이 성상파괴정책과 결합되면서 점차 성상파괴-성상옹호라는 신학적인 대결구도가 희미해져 가기 시작했다. 즉, 종교적인 의미가 퇴색되고 계급 및 사회갈등이라는 엉뚱한 분위기가 제국을 휩쓸게 된 것이었다.
또한 콘스탄티노스는 성상파괴정책을 두둔하지 않는 사람들을 체포한 뒤 전차 경기가 열리는 대형 원형경기장에서 공개적인 처벌을 가해 사람들로 하여금 성상파괴정책에 동조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압박하였다. 게중에는 매질을 당하고 거리에 조리돌림당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미 공개적으로 눈이 뽑혀 장님이 되는 형벌은 일반적인 형벌이었다. 이렇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순교자로 간주되었거 나중에 시성(諡聖)되어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도 있었는데, 스테파노스(Στέφανος)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수도사였던 스테파노스는 성상 공경에 대한 주장으로 인해 외딴 섬으로 추방되는 형벌을 받았는데, 석방이 되자마자 황제를 알현하여 황제가 보는 앞에서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금화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짓밟았다고 한다. 언뜻보면 일국의 군주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지만 이것은 형상(금화의 얼굴)이 원형질(황제 자신)과 같은 질료를 가지지 않는 이상 그것을 대표할 수 없다는 콘스탄티노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었다. 황제가 기분 나빠한다면 과연 그리스도와 성모는 어떻겠냐는 의미였다. 콘스탄티노스는 스테파노스의 행동에 격분하였으나 그에게 사형을 내리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를 안 관료들이 스테파노스에 더욱 분노하게 되었고 결국 그는 살해되고 만다. 또한 아나스타시오스를 이어 콘스탄타누폴리스의 총대주교좌에 앉았던 콘스탄티노스 2세(Κωνσταντίνος Β': 754-766)는 766년 성상 옹호론자들의 음모에 연루되어 조리돌림당한 뒤 참수당했다.
이렇듯 콘스탄티노스 5세의 적극적인 성상파괴정책은 비잔티움 제국의 교회 풍습을 일거에 바꿔놓았다. 벌써 이에리아에서 열린 주교 회의에 성상파괴를 지지하는 주교들이 300명 넘게 참석했다는 것은 제국 내에서 성상파괴에 대한 찬동과 동조가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당시 사회상을 기술한 몇몇 자료들을 근거로 살펴보면 당시 사람들은 성상파괴론자들을 무식하고 잔인하게 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신학적인 이유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라 여긴 듯 하다. 이런 분위기 하에서 동방 교회에서는 성화상이 많이 사라지고 이미 그려진 성당 내 그림들은 회칠이 되어 가려졌다.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불가르족과의 전쟁 이후 부상으로 인해 사망한 뒤 제위에 오른 레온 4세(Λέων Δ')는 성상 옹호론자와의 화해 무드를 조성하였다. 그 결과 레온 4세는 재위기간 중에 '성모의 친구'로 칭송받았고 세계총대주교로 성상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가진 파블로스 4세(Παύλος Δ': 780-784)를 임명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도 본래 성상파괴론자였으며 치세 말년에는 성상파과정책을 강화하였다. 황후였던 이리니(Ειρήνη)에게서 성화상이 발견되자 그때부터 침실을 같이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레온 4세는 제위에 오른지 5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16
이제 여기서부터 상황이 역전된다.
레온 4세의 뒤를 위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10살의 꼬마 콘스탄티노스 6세(Κωνσταντίνος ΣΤ') 였다. 사실상 실권은 당시 섭정이었던 태후 이리니가 쥐고 있었다. 태후 이리니는 아티네(Αθηναι)18 귀족 집안 출신으로 앞에서 언급한대로 성상공경을 옹호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의 남편이 죽자 어린 아들이 제위에 올랐는데 이에 반발한 세력이 레온 4세의 이복동생인 니키포로스(Νικηφόρος)를 황제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였다. 영리한 이리니는 재빨리 니키포로스에게 사제품을 받게 하여 권력 계승 서열에서 제외시키는 한편 시켈리아(Σικελία, 현재의 시칠리아)의 총독이었던 엘피디오스(Ελπίδιος)가 일으킨 반란을 잠재우면서 콘스탄티노스 6세의 제위와 자신의 통치에 불만을 품는 반대파를 제압하였다.
이렇게 내부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해내니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이리니 태후를 뛰어넘을 사람이 없었다. 비록 황제가 있었으나 그는 아직 어린 나이의 소년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성이었던 이리니 태후의 활동을 달갑지 않게 보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으며, 더구나 782년 그녀가 압바스(لعبّاسيّون) 왕조와 맺은 굴욕적인 대외 화친 정책부터 시작해서 삐걱거리는 일이 매우 많았다.19 그러나 어려움에 처한 이리니 태후는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 뿐 아니라 대내적인 통치 및 대외 관계 개선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성화상 공경과 관련된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성상 공경이 제국의 종교정책이 되면 제국 내의 성상옹호론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서방 교회와도 연결되어 자신의 입지를 넓힐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결국 세계 공의회를 열어 성상 공경을 옹호하는 교의를 채택하기로 마음먹는다. 왜냐하면 754년 콘스탄티노스 5세에 의해 성상파괴정책을 강력히 지지한 이에리아 주교 회의는 비록 "머리 없는 공의회"라는 비아냥을 듣긴 했어도 명목상 "7번째 세계 공의회"라고 공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정을 돌이키려면 동일한 수준의, 아니 그보다 더 진정성이 있는 세계 공의회여야 할 것이었다.
이리니 태후는 784년 세계총대주교를 교체하는데 이 때 임명된 사람이 바로 타라시오스(Ταράσιος: 784-806)였다. 타라시오스는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유력 가문 태생으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으며 성상 공경에 우호적이었고 세속 권력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리니 태후로서는 최고의 세계총대주교감이었던 것이다.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임명 당시 그는 성직자가 아니라서 보제품조차 받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타라시오스는 며칠만에 초고속으로 주교품을 받아 세계총대주교좌에 올랐다. 타라시오스는 이윽고 교황 하드리아노 1세(Hadrianus I: 772-795)에 편지를 보내 곧 세계 공의회를 개최할 터이니 직접 참석하거나 특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성상파괴에서 성상공경으로 제국 정부의 입장이 바뀔 것을 감지한 하드리아노 1세는 크게 기뻐하며 페트루스(Petrus)라는 이름을 가진 수석사제를 교황 특사로 일단의 사절을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보냈다. 서방 교회의 수장인 교황의 특사가 참석하였고 동방 교회의 수장인 세계총대주교가 직접 공의회를 주관하게 되었으니 이는 이에리아에서 열렸던 공의회 때보다 더 진정한 공의회로 여겨졌다. 타라시오스와 이리니 태후로서는 754년의 성상파괴정책을 뒤집을 수 있는 좋은 호기였던 것이다.
드디어 786년,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성 사도 성당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성상파괴정책을 지지하는 군대가 성당에 난입하면서 회의가 엉망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리니 태후는 여기서 포기할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태후는 콘스탄티누폴리스의 군대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원정을 보내어 분란의 싹을 없애 버렸고, 그것마저도 안심이 안 되어 콘스탄티누폴리스가 아닌 니케아(Νίκαια)에서 공의회를 다시 개최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이듬해였던 787년 9월의 일이었다. 교황 특사를 포함하여 총 350여명의 주교들이 모여 회의를 진행하였는데 공의회에서 다룬 주된 내용은 바로 성상 공경에 관련된 일이었다. 결과는 당연히 다음과 같았다: 성상파괴정책을 지지했던 754년의 공의회 결정을 무효로 하고 단죄함과 동시에 성상 공경은 교리적으로 옳은 일이다. 특히 성화상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저주문이 포함되었다.
성상 공경 옹호론자들은 여기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고 제국의 종교 정책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레온 3세가 최초로 성상파괴정책을 실행한 것이 726년으로 무려 60여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성상파괴정책이 공식적으로 철회된 것이다. 비록 60년의 긴 시간으로 인해 성상 정책을 예전으로 돌리는데 많은 혼란이 뒤따랐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생각보다 일이 그렇게 어렵게 진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 내의 많은 사람들이 콘스탄티노스 5세처럼 치열한 신학적 고찰을 거친 뒤 성상파괴정책에 동조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레온 3세는 티라 화산섬의 폭발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지고 제국이 어려워진 그 시기에 성화상이라는 공공의 적을 상정해놓고 그것을 혁파하는 운동을 펼침으로써 제국에 내재하는 위험 요소들을 해소하는 정치적인 행동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할 수 있겠다. 일부 동방교회의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국가와 황제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기 위해 황제가 정한 정책을 충실히 따라주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무수히 봤듯이 동방 교회에서 세속 황제가 교회와 교리에 간섭하게 되면 동방 교회의 주교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에 따라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동방의 모든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단성론자인 것이 아니고, 단의론자인 것도 아니었다. 황제의 결정은 서방 세계에서 교황의 결정만큼이나 중요하고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위에서 그러한 결정이 나면 그게 아닌듯 싶더라도 따라가는 것이 비잔티움 사람들의 행동 양식이었다. 따라서 성상파괴정책이 비잔티움 제국을 성상파괴론자와 성상옹호론자 두 세력으로 양분시켜 혼란을 격화시켰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성상파괴론자와 성상옹호론자라는 말은 그 윗분들의 파워게임의 편가르기 수단이었고, 더 나아가 서방 교회가 독립하는 구실로 사용한 정치적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 성화상 논란에서 콘스탄티노스 5세 황제만이 그토록 순수한 신학적 고찰과 굳은 신념을 가지고 성화상을 때려 부수고 성상옹호론자를 그렇게도 심하게 박해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성상파괴의 괴수로 낙인찍혀 두고두고 동서방 교회 양쪽 모두로부터 힐난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 성상 논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754년 이에리아 주교 회의로 대표되는 콘스탄티노스 5세의 열정을 그대로 닮은 성상파괴론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9세기로 넘어가게 되면서 성상파괴운동은 그 정치적인 수단으로서의 본질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성상파괴논쟁이 일단락 된 787년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정치적 혼란에 휩싸이고 군사적 실패로 쇠락의 일로를 걷게 된다. 앞서 살펴보았듯 이리니 태후는 자신의 뜻대로 종교 정책을 좌지우지한 것도 모자라 섭정이 아닌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보였고, 결국 자신이 낳은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6세(Κωνσταντίνος ΣΤ')의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들고 쫓아내는 잔인함마저 드러내었다. 실제로 그녀는 여제가 되었지만, 잔인한 제위 탈취 뿐 아니라 실패한 대외정책 등으로 인해 워낙 자신의 인기가 떨어지게 되었고 그녀는 결국 파격적인 감세(減稅) 정책을 단행하는 아주 저열한 포퓰리즘 정책까지 실시하게 된다. 아주 후한 세금 감면에 백성들은 환호했지만 결국 나라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쇠락한 나라를 어떻게 해 보고자 서방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한 이리니 여제는 프랑크 왕국에서 교황 레오 3세 (Leo III: 795-816)에 의해 서로마의 황제로 등극한 샤를마뉴(Charlesmagne)와 혼인을 추진하였으나 오히려 이는 비잔티움 백성들의 공분을 샀다. 결국 이리니 여제는 반란으로 쫓겨나게 되고 유력한 장군이었던 니키포로스(Νικήφορος)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이때부터 비잔티움 제국은 크룸(Крум)의 지도 하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불가르족과 일대 전쟁을 치르게 된다. 811년의 대공세 끝에 황제 니키포로스는 불가르족의 수도를 약탈하고 크룸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나 단 한번의 전투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군대를 모두 잃고 자신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아들이자 공동황제였던 스타브라키오스(Σταυράκιος)도 척수가 잘린 채 겨우 콘스탄티누폴리스로 도망쳐온지라 황제직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였다.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미하일 1세(Μιχαήλ Α')는 크룸의 압력으로 인해 스스로 퇴위하였고 수도사가 되었다. 그 뒤를 이은 황제가 11편 전반의 핵심 인물인 바로 레온 5세(Λέων Ε')였다.
레온 5세 즉위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앞서 언급했듯 군사적으로 불가르족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또한 동쪽의 이슬람 제국에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바쳐 겨우겨우 전쟁을 면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제국 내부의 민심은 뒤숭숭했다. 이 때 다시 고개를 든 것이 성상파괴론이었다. 비록 7차 세계 공의회를 통해 분명히 매듭이 지어졌지만 아직도 제국 내부에는 성상파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군대와 콘스탄티누폴리스의 고위 관료층에서 성상파괴를 지지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았다. 813년 레온 5세가 즉위하기 전에는 일단의 군사들이 성 소피아(Αγία Σοφία)의 영묘에 잠들어있던 성상파괴론자 콘스탄티노스 5세(Κωνσταντίνος Ε')의 석관으로 달려가 지금 부활하여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해달라고 대성통곡하는 사건이 벌어질 정도였다. 그 당시로부터 100여년동안 뚜렷한 군사적 업적을 남기며 제국의 위신을 보였던 황제는 콘스탄티노스 5세밖에 없었는데 마침 그가 유명한 성상파괴론자 아니었던가. 현재의 대외적 위기는 모두 그가 견인했던 성상파괴에서 성상공경으로 입장을 선회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국 내의 성상파괴론자들 사이에서 꽤나 설득력있게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레온 5세가 성상파괴정책을 지지했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봐도 알 수가 있다. 그의 황제 이름은 성상파괴정책을 최초로 시작한 레온 3세와 같다. 또한 그는 공동황제로 임명한 자신의 아들인 심바티오스(Συμβάτιος)의 이름을 콘스탄티노스로 바꿨는데 이는 레오 3세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5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그는 사바티오스(Σαββάτιος)라는 광신적인 예언자의 예언을 들었는데, 그는 이레네 여제를 난폭한 난봉꾼, 암컷 표범으로 묘사하고 당시 총대주교인 타라시오스의 이름을 타라씨오스(Ταράσσιος), 곧 훼방꾼으로 불렀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타라쏘(ταράσσω)가 '휘젓다, 방해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종의 언어유희를 이용한 비난이었다. 그는 만일 황제가 성화상을 파괴하지 않으면 권좌에서도 내쫓길 것이라는 예언도 빼놓지 않았다.
레온 5세는 자신의 황제 등극을 예언한 필로밀리온(Φιλομήλιον)이라는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사바티오스의 예언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훗날 세계총대주교가 되는 자신의 조언자인 테오도토스 1세(Θεόδοτος Α': 815-821)와 이 문제로 의논하였고, 비밀리에 위원회를 구성하여 각지의 수도원과 교회를 뒤져 과거의 서적과 문서를 찾아낸 뒤 성상파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을 연구할 것을 지시하였다. 여기에 동참한 이들이 모두 2차 성상파괴운동 시기에 총대주교가 된 안토니오스 1세(Αντώνιος Α': 821-837), 요안니스 7세(Ιωάννης Ζ': 837-843)였다. 마침내 이들은 콘스탄티노스 5세가 주재한 754년의 이에리아 주교 회의와 관련된 문서를 발견했고 약 60여년전의 이 자료로부터 성상파괴의 근거를 확인하였다. 그들은 입을 모아 성상파괴를 부르짖은 황제들은 황제로서의 권위를 지닌 채 천수(天壽)를 누리다가 죽었으나 성상공경정책 하의 황제들은 모두 비참한 죽음과 불명예스런 퇴위를 맛보았다고 주장했다.
성상파괴로 제국의 종교정책을 바꿀 것을 결심한 레온 5세에 맞선 사람은 당시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였던 니키포로스 1세(Νικηφόρος Α': 806-815)와 가장 보수적인 수도원주의의 중심지었던 스투디오 수도원(Μονή Στουδίου)의 수도원장이었던 테오도로스(Τεόδοωρος)였다. 그러나 예르마노스 1세가 레온 3세에게 그랬듯이 니키포로스 1세 역시 레온 5세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총대주교청 밖에서는 군사들이 모여 성상 공경을 옹호했던 타라시오스와 니키포로스에 대한 저주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고, 이리니 여제가 할키(Χαλκή) 문에 다시 세운 그리스도 성화상은 진흙과 돌세례를 받고 있었다. 결국 총대주교는 테오도토스 1세로 교체되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주교 회의를 개최하였고 여기서 성상파괴 정책이 다음과 같이 재확인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공교회로부터 가짜 성화상을 제작하는 행위를 완전히 추방시키며 타라시오스에 의해 결정된 성화상에 대한 공경의 예를 거부한다. 그림에 대한 부당한 경의를 기초로 한 타라시오스의 주교 회의에서 결정된 신조를 모두 없던 것으로 하고, 촛불을 밝히며 향을 피우는 것을 금한다. 그러나 교부들의 교의를 기반으로 하여 콘스탄티노스와 레오 황제 치세 기간 중에 블라혜르네스(Βλαχέρνες)에 있는 흠없는 동정녀 사원에서 열렸던 주교 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이니 성화상, 곧 우상이라고 불리는 것을 삼가며 이들이 경배받지도 예배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
레온 5세의 치세는 짧았으나 콘스탄티노스 5세에 비견될만큼 제국 내의 성직자 및 수도사 사이의 마찰이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여기에는 과거와는 달리 양측에게 모두 확실한 근거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상파괴론자들은 위기에 처한 제국의 현실과 콘스탄티노스 5세가 연 히에리아 주교 회의를 주목했다. 특히 대토지와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수도원들이 대부분 성상 공경을 옹호했으므로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사회 병폐를 개선하려는 제국의 이해 관계가 겹치면서 성화상 파괴를 부르짖는 목소리는 더욱 격렬해졌다. 하지만 성상 옹호를 주장하는 자들은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를 차용하여 성화상 공경의 정당성을 주장한 다마스키노스(Δαμασκηνός, 현재의 다마스쿠스)의 요안니스(Ιωάννης)를 지지하였으며 또한 그들은 교황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7차 세계 공의회의 신조는 자신들의 바른 신앙을 더욱 확고하게 보여 주는 사례라고 믿고 있었고, 이러한 주장은 수도원주의자들에게 계승되어 매우 완고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양측이 전에 없이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바람에 수많은 수도사들이 투옥되거나 추방되거나 고문당해 죽었고,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많은 수도원들이 폐쇄되거나 그 재산이 몰수되었다. 성화상의 파괴는 전보다 더 격렬하여 많은 그림들에 회칠이 되거나 오물을 뒤집어쓰고 모자이크화는 벗겨지는 등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이 성상파괴정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레온 5세는 성탄절 새벽에 암살당했고, 그가 경계했던 미하일 2세(Μιχαήλ Β')가 감옥에서 풀려나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미하일 2세는 아모리오(Αμόριο) 출신으로 소아시아의 투박한 농민 출신 군인이었고 성상파괴론자였다. 처음에는 온건한 정책을 펼쳤던 그가 성상파괴정책을 다시 꺼낸 것은 821년 슬라브족 출신인 토마스(Θωμάς)가 일으킨 반란 때문이었다. 토마스는 반란 중에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 욥 1세(Ιώβ Α': 810-826)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는데 당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성상공경 옹호론자였다. 결국 토마스의 반란은 레온 5세의 암살에 대한 복수심, 미하일 2세의 개인적인 야망, 제국 내 비(非)그리스 민족의 불만, 그리고 성상 파괴에 관련된 반대 등이 복잡하게 얽혀져 비잔티움 제국 역사상 가장 큰 반란으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성상파괴정책은 미하일 2세의 아들인 테오필로스(Θεόφιλος) 황제 때 정점을 찍었다. 테오필로스는 어릴 때부터 총대주교 요안니스 7세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요안니스는 당시 제국 내에서 학식이 뛰어난 사람으로 그라마티코스(Γραμματικός)26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테오필로스는 일자무식이었던 아버지 미하일 2세에 비해 박식했고 예술에 대한 안목이 뛰어났다고 한다. 이는 곧 성상파괴정책에 관한 의견은 모두 스승이었던 요안니스에게서 스며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할 수 있겠다. 832년에 황제는 칙령을 내려 제국 내에서의 모든 성상 공경 행위를 금지시켰고 이를 어긴 사람들을 박해했지만 그 강도는 예전에 비해 훨씬 누그러졌다. 그가 레온 5세나 콘스탄티노스 5세같이 열렬한 성상파괴론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다만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황제의 권력을 세울 때에 적절히 성상파괴정책을 이용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제국 내에서의 성상파괴론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미 오랜 기간 성상에 대한 논쟁을 거치면서 서로 힘을 너무 낭비했기 때문이지만, 테오필로스 치세 중에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서 성상에 관련된 논쟁이 점차 잦아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테오필로스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이질에 걸려 842년에 사망하게 된다. 그에게는 833년에 얻은 아들 콘스탄티노스가 있었으나 세 살의 나이로 숨지게 되었고 남은 유일한 아들은 840년에 태어나자마자 공동황제로 임명된 갓난아기 미하일 3세(Μιχαήλ Γ')였다. 고작 두세살밖에 되지 않은 황제가 제국을 다스릴 수는 없었고 테오필로스의 아내였던 테오도라(Θεοδώρα)가 모후이자 공동황제로서 섭정을 맡게 된다. 자, 여기서 뭔가 아까 전에 나왔던 그 분위기가 솔솔 느껴지지 않는가? 만일 그렇다면 글을 제대로 잘 읽은 것이다. 이제 동일한 드라마가 곧 펼쳐진다. 이제 여기서부터 상황이 역전된다.
테오도라 여제는 뛰어난 미모를 가졌던 파플라고니아(Παφλαγονία) 출신으로 아르메니아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성상공경을 옹호하는 사람이었고 몰래 황궁으로 성화상을 들여와 공경하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시종 중 한 명이 테오도라가 성화상에 공경의 예를 표하는 모습을 보았고 이를 전해듣게 된 테오필로스 황제가 테오도라 황후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그녀는 단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며 시치미를 떼었다고 한다. 그는 과거 콘스탄티노스 6세의 섭정이었던 이리니(Ειρήνη) 태후와 많은 면이 흡사했다.
테오도라는 테오필로스 사후 갓난 아이 황제를 보좌할 섭정단을 구성했는데 거기에는 유능한 정치가였던 테옥티스토스(Θεόκτιστος)와 자신의 형제였던 바르다스(Bάρδας)와 페트로나스(Πετρωνάς)가 있었다. 셋은 모두 테오필로스 황제의 성상파괴정책을 철회할 것을 테오도라 여제와 모의하였고, 그 첫 신호탄으로 테오필로스 황제의 스승이자 성상파괴론자 세계총대주교인 요안니스 7세를 자진 퇴위시킨다. 그리고 그 자리는 오랜 기간 성상파괴정책으로 인해 박해를 받았던 메토디오스 1세(Μεθόδιος Α': 843-847)에게 돌아간다. 세계총대주교가 된 메토디오스 1세는 테오도라와 함께 주교 회의를 소집하게 된다. 이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성상파괴정책은 철회되고 성상에 대한 공경이 올바른 신앙임을 결정한 7차 세계 공의회의 결정이 재확인되었다.
이로써 성상 파괴와 관련된 논쟁이 제국 내에서 완전히 종결되었다. 동방 정교회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열린 이 주교 회의의 결정을 기리는 의미에서 사순절 첫 주일을 축일로 지정하였고 이를 정교주일(Κυριακή της Ορθοδοζίας) 혹은 정교 신앙의 승리(Θριάμβου της Ορτοδοζίας)라고 불러 기리고 있다. 원래 이 날은 성상파괴정책이 철회되고 성상에 대한 공경신앙이 옳은 것으로 인정된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성상파괴운동 뿐 아니라 9세기 이전까지 신학적 논쟁을 촉발시켰던 모든 이단 논쟁, 곧 아레이오스(Αρειος)주의, 네스토리오스(Νεστόριος: 428-431)주의, 단성론, 단의론까지 포함시켜서 그러한 이단들로부터 올바른 신앙을 지켜냈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니케아에서 열린 2차 공의회, 곧 7차 세계 공의회는 동서방 교회가 공히 인정하는 마지막 세계 공의회였다. 일곱 차례의 공의회 끝에 기독론에 대한 교의가 거의 명확해졌다. 물론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기독론에 대한 이견을 주장한 학자와 성직자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규모와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지역 주교 회의를 통해 단죄를 내릴 수 있을 정도로 교의가 명확해졌던 것이다. 실제로 11편을 끝으로 기독론과 관련된 동서교회 사이의 논쟁은 완전히 정리되었고, 이제 이후로 등장하는 이야기는 '필리오케(filioque)' 논쟁29을 빼면 거의 정치적인 이야기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혹자는 성상파괴운동은 어떻게 보면 허무한 운동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레온 3세가 최초로 정책을 실행에 옮긴지 120여년이 지났으나 성상 공경의 신앙은 옳은 것으로 결정되어 동방 정교회에서도 이내 성화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꽃피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상파괴를 주장하던 사람들의 저작과 사상은 이단으로 간주되어 모두 말소되었기 때문에 단지 벗겨진 모자이크화로부터 그들의 생각을 읽어내는 수준에 불과하며, 성상옹호론자들은 지독하게도 성상파괴론자들에 대해 불리하게 서술한 역사를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성상을 가지고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 대결하던 사람들은 성상이 가진 기독교적 의미보다는 대내, 대외적인 정치상황에 더 주목하였던 것이었고 단지 성상은 구실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일어난 기독론 논쟁에 비하자면 비교적 아주 중요한 교의를 건드리는 치명적인 논쟁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한 마찰이 빚어졌고, 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이 곤란을 겪어야했다. 일견 쓸모없는 소모적 논쟁으로 제국만 피폐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교회의 전통을 '거룩한 전통'으로 여기며 성경의 가르침과 동등하게 혹은 그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의 성직자들에게는 성화상과 관련된 논쟁이 자신들의 빛나는 전통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극렬하게 성상 공경의 전통을 고집스럽게 수호했던 것이다. 만일 성상파괴가 옳은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약 7-8세기동안 교회는 비그리스도교적인 가르침을 전파한 것이고 따라서 진실되고 옳은 가르침은 오직 교회만이 소유한다는 그들의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은 물론 신자들의 이탈을 감수해야 할 것이었다. 그렇게되면 교회의 조직은 파국이 이를 것이고 이를 복구하는 것은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만만치 않았을 터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상 공경의 전통이 옳은 것임을 증명해야 했다. 따라서 성상파괴운동은 급진적인 사회 개혁 운동에 대한 보수적인 종교적 대응 운동 사이의 마찰로 점철되었고, 두 주장 사이에서 합치되는 부분이 전혀 없었던바 소모적인 싸움으로서 제국의 에너지를 낭비했던 것이다. 또한 정권이 급작스럽게 바뀌어 실권이 반대파에게 넘어가면 자동으로 없던 일로 되돌아가는 역사 속 수많은 개혁 정책 ㅡ 영국의 메리 여왕의 가톨릭 복고 운동, 조선왕조 조광조의 현량과 등등 ㅡ 의 전철을 밟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성상파괴령이 동서교회의 종교적 분열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성상파괴논쟁이 동서교회의 대분열을 불러일으켰다기보다는 서로의 차이점을 더욱 극명하게 서로 알게 해 주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어찌되었든 로마 가톨릭 교회는 비잔티움 제국의 성상파괴운동을 황제의 정치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구실로 삼았고, 때마침 서유럽에는 비잔티움 제국을 대체할 야만족의 국가들이 강성해지기 시작했다.